항목 ID | GC017019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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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明設學校 |
영어의미역 | Myeongseol School |
이칭/별칭 | 명선학당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교육/교육 |
유형 | 기관 단체/학교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중동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일주 |
[정의]
개항기 충청남도 공주시 중동에 있었던 사립 교육 기관.
[개설]
명설학교는 충청권에서는 최초의 근대 학교라는 점에서 대단히 큰 의미가 있다. 1896년에 미국 감리회의 한국선교연합회에서는 수원과 공주를 한 구역으로 묶어서 스크랜톤(W.B. Scranton)을 구역 담임자로 임명하였다. 당시 공주를 선정한 이유는 공주에 충청남도의 관찰부(현 도청)가 소재해 있었기 때문에 충청 지역의 선교 거점 지역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변천]
스크랜톤이 여러 차례 공주를 방문한 이후 1901년 의료 선교사였던 맥길(W.B. McGill)이 개척 선교사로서 공주에 파송되어 수년간 전도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맥길이 미국에 들어갔다가 개인 사정으로 올 수 없게 되자 로버트 샤프(Robert A. Sharp)와 한국명이 사애리시(史愛理施)였던 그의 부인 앨리스 샤프(Alice Sharp)가 1904년 공주의 선교사로 파송되어 조사(助事: helper)였던 윤성렬(尹聲烈)과 함께 공주에 와서 명설학교와 명선여학교를 세웠다.
대화정군(大和町郡) 관아 뒤편[衙後]인 공주군 남부면 하리동(下梨洞)[지금의 공주시 중동] 언덕에 초가집 두 채가 있었는데, 바깥채[外舍]는 예배소로 사용하고, 안채는 학교로 사용하여 교명을 ‘명설’이라고 하였다. 이때의 학교 명칭을 ‘명선여학교(明宣女學校)’라고 했다고 하는 기록도 있으나, 2002년 6월 30일 철거된 공주영명중·고등학교 건물의 우석(隅石)에서 나온 여러 자료 중 「대정오년시월 사립영명학교상황일람(大正五年拾月 私立永明學校狀況一覽)」에 의하면 최초 교명이 ‘명설’임이 틀림없다.
사애리시는 남편인 샤프 목사가 논산 은진 지방에 갔다가 발진티푸스(이질)에 걸려 1906년 3월 15일 사망하자 일시 미국으로 들어갔다. 이에 따라 명설학교를 더 이상 운영할 수 없어 당시 여러 차례 폐교를 검토했다. 그러나 샤프 목사의 후임으로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스(Frank Earl Cranton Williams, 한국명 우리암)가 공주에 파송되어 1906년 공주야소교, ‘중흥(中興)학교’를 재정비하였다. 1909년 사립영명학교를 인가받아 학교의 기틀을 새로 마련하여 정상적인 교육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오늘날 공주영명중·고등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교육활동]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명설학교가 순조롭게 출범하지는 못하였다. 명설학교에서는 앨리스 샤프의 지도로 단지 몇 명의 아동을 가르쳤으나, 교과 정도와 기타 제반 사항이 대부분 미비하였다. 설립 당시에는 중등 교육을 목표로 하였으나, 초등 교육을 널리 실시하지 못하고 있던 그때의 상황을 감안하여 초등학교까지 병설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899년 중학교 관제가 공포되었으나 명설학교는 학년과 학기 구별이 없었고, 취학 연령도 제한이 없었으며, 교과목도 일정하지 않았다. 초창기에는 주로 한글로 된 성경 읽기와 쓰기를 가르쳤고, 한글 작문, 편지 쓰기, 산술을 추가하였다.
수정일 | 제목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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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2 | [변천] 및 설립자 수정 | <변경 전> 한국명이 사애리시였던 앨리스 샤프(Alice Sharp)가~학교를 세웠다,/1906년 10월 15일에 교명을 ‘중흥(中興)학교’라고 개칭하고, 학교의 기틀을 새로 마련하여 <변경 후> 로버트 샤프(Robert A. Sharp)와 한국명이 사애리시(史愛理施)였던 그의 부인 앨리스 샤프(Alice Sharp)가~ 명설학교와 명선여학교를 세웠다./ 1906년 공주야소교, ‘중흥(中興)학교’를 재정비하였다. 1909년 사립영명학교를 인가받아 학교의 기틀을 새로 마련하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