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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농악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4624
한자 光山農樂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광주광역시 광산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옥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92년 3월 16일 - 광산농악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 지정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92년 - 광산농악 광산문화원에서 발간한 『광산농악』 상권과 하권에 수록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94년 - 광산농악 한국향토사연구전국협의회에서 발간한 『한국의 농악-호남』에 수록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94년 - 광산농악 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에서 간행한 『호남우도풍물굿』에 수록

[정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일대에서 전승되고 있는 농악.

[개설]

광산농악은 지역적으로는 호남우도농악에 속하며, 전라남도의 서부 평야지대를 중심으로 발달한 농악이다. 광산농악에는 마을 농악의 농악과 뜬쇠들에 의해 형성된 판굿 농악의 두 가지 계열이 있다. 현재의 광산농악마륵동의 판굿 농악을 중심으로 칠석동의 고싸움놀이농악과 소촌동의 당산농악, 산월동의 풍장농악 등 광산 지역에서 연주되는 다양한 농악을 집대성한 것이다. 1992년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광산농악 상쇠의 전승 계보는 최화집 - 강성옥 - 박성근 - 김성락 - 전경환 - 정득채로 이어지고 있다.

[채록/수집 상황]

1992년에 광산문화원에서 발간한 『광산농악』 상권과 하권에 자세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으며, 1994년 한국향토사연구전국협의회에서 발간한 『한국의 농악-호남』과 1994년 전북대학교 전라문화연구소에서 간행한 『호남우도풍물굿』에 관련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구성 및 형식]

광산농악은 호남 우도의 지역적 기반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마을굿의 형태를 보유하고 있으며, 전문 음악인들의 판굿도 함께 연행하고 있다. 광산농악의 편성은 쇠[꽹과리], 장고, 북, 징, 소고들의 ‘앞치배’와 ‘잡색’이라고 불리는 ‘뒤치배’로 편성된다. 여기에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쓰인 ‘농기(農旗)’와 ‘영기(令旗)’가 추가되고 나팔수와 새납[태평소] 등이 추가된다. 일반적으로 농기수 1명, 영기수 1명, 나팔수 1명, 새납수 1명, 꽹과리 4~6명, 징 3~4명, 장고 6~8명, 통북 8~10명, 소고 20~25명으로 구성된다. 잡색의 구성은 대포수 1명, 양반 1명, 조리중 1명, 참봉 1명, 남무동 1명, 여무동 1명 등 8명으로 구성된다. 잡색에는 비리쇠, 홍적삼 등이 추가되기도 한다.

복색은 상쇠, 부쇠를 제외한 전원이 흰 복장에 고깔과 삼색띠를 두르며, 상쇠를 비롯한 쇠잡이들은 새털로 만든 부포를 단 뻣상모를 쓰고 옷은 흰 바지저고리에 오색동이를 댄 창옷을 입는다. 조리중을 제외한 잡색들이 모두 나무로 만든 탈을 쓰며, 조리중은 박바가지로 만든 탈을 쓴다.

[내용]

광주광역시 광산구영산강 상류의 황룡강극락강을 끼고 드넓게 펼쳐지는 평야를 보유한 지역이다. 자연지리적 조건이 적합하였기 때문에 예로부터 농업을 생계로 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자연스럽게 전통적인 농경문화인 농악도 활발하게 연행되었다. 하지만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와 도시화를 거치며 점차 약화되었고, 일부 예능인들에 의해서만 전승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광산구 마륵동, 소촌동 등지에서 활동하던 일부 농악인들로 구성된 ‘광산소촌농악’ 팀이 1988년 제29회 전주에서 열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하여 공로상을 수상하였다. 이를 계기로 광산구 마륵동 노인들의 증언과 전남대학교 교수 지춘상의 고증 등을 참고하여 광산농악을 복구하게 되었다. 이때 당시 차행선 광산문화원장과 이종일 광주시문화예술과장 등 행정가들도 많은 역할을 하였다. 1989년 제30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광산마륵농악’으로 참가하여 입상하였고, 1990년과 1991년 대회에서 연이어 농악 부문 문화부장관상을 수상하였으며, 1992년 3월 16일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89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할 때 상쇠를 맡았던 전경석은 호남우도농악 보유자인 전경환의 친동생이다. 2대 상쇠인 정득채 또한 광산농악대의 활동 전에 영광우도농악대에 참여하여 전경환 상쇠에게 사사하였다. 그래서 광산농악의 연행 내용은 영광우도농악과 유사한 점이 많다.

광산농악의 초대 상쇠 정득채는 함평군 월야면 출생으로 청소년 시절부터 월야면 출신의 상쇠에게 꽹과리를 배웠다. 40세 이후에는 영광우도농악단에서 종쇠 및 부쇠로 활동하였다. 설장구의 김종회는 담양군 무정면 출생으로 20세부터 영광군의 김만석, 나주시 영산포의 강성수, 광주광역시의 최막동 등 설장구 명인들에게 사사했고, 35세부터 임방울극단, 여성국극단 등에서 활동하면서 전경환, 김오채 등 호남우도농악 명인들과 함께 활동하였다.

설북의 서창순은 무안군 일로읍 출생으로 10세부터 걸립패의 소동으로 활동하면서 진안군의 김복만, 고창군의 김홍식, 영광군의 김성락, 장성군의 유흠선 명인들에게 통북 및 들놀음 기능을 전수받았다. 서창순도 영광군의 전경환과 같이 영무장농악 활동을 하였다.

광산농악은 문굿, 당산굿, 철용굿, 샘굿, 들당산굿, 마달밟이, 날당산굿, 판굿 등 다양한 굿거리를 보유하고 있다. 문굿은 걸립을 다니는 농악대가 다른 마을에서 걸립하려 할 때 해당 마을에서 요구가 있으면 연주하는 굿이다. 말 그대로 문을 여는 굿인데, 영기를 X자 모양으로 세워 문을 만들고 그 앞에서 연행한다. '문잡기, 덕석몰이[33채], 아궁잽이, 가새치기[가위틀음], 개인놀음[구정놀이]'으로 구성된다.

당산굿은 당산에 이르기까지 질굿을 연주하다가 도착하면 인사굿 가락으로 맺고 본격적인 당산굿에 들어간다. 먼저 진굿을 연주하면서 당산에 들어가고 당산 앞에서 오방진을 한후 인사굿을 드린다. 이후 짝드름과 개인놀이를 하고 고사를 지낸 후 개인놀이를 한다. 당산굿을 끝낼 때는 벙어리삼채를 연주한다. 철용굿은 철용에 도착한 후 철용님 달래는 가락을 연주하고 인사한 후 고사를 지낸다. 이후 다시 인사하고 퇴장한다. 샘굿은 샘에 도착할 때까지 질굿을 연주하다가 도착하면 가락을 맺고 일체가락으로 입장한다. 샘굿가락을 연주하고 인사한 후 고사상의 음식을 나누어 먹고 다시 인사한 후 샘을 떠난다.

마당밟이는 각 가정 문앞에 도착하면 문굿을 연주한다. 마당에 들어서서 집주인과 인사하고, 마당굿을 연주한 후 「성주풀이」, 액맥이, 중천맥이의 노래로 축원한다. 부엌으로 가서 정지굿을 하고, 뒷마당에서 장광굿을 연주한 후 인사한다.

판굿은 굿머리마당[내드름굿]-질굿마당-오방진마당-삼채마당[잦은몰이]-허허굿마당-구정놀이[개인놀음]-섞음굿[허튼굿]의 일곱마당으로 구분한다. 여기에 연주되는 가락을 중심으로 나열하면 인사굿-오채질굿-된오채질굿-늦은일채굿-벙어리삼채-벙어리일채-된삼채-음매깽-잦은일채-오방진-구정놀이-허허굿-좌우진퇴-지신매기-지신밟기-콩동지기-용틀임-개인놀이-허튼굿의 21개 가락이 있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광산 일대에서 전래되어 온 광산농악은 옛날부터 정월대보름에 마을마다 집집을 돌면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연행하였던 마을굿이었다. 정월대보름을 전후하여 마을 제사인 당산굿을 치고, 이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마당밟이를 하였다.

[현황]

광산농악광주광역시 광산구 일대를 중심으로 비교적 전승이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다. 광주광역시 전통문화관에 보유자인 김종회가 입주하여 전승 및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편 민속연희단체 ‘얼쑤’[광주광역시 남구 포충로 937]는 광산농악의 전통을 지키면서 현대인들과 소통할 수 있는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광산농악은 호남우도농악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가락의 변화와 기교가 다양하며 뒤치배의 구성이 조직적이고 다채롭게 꾸며진다. 또한, 광산농악은 문굿, 당산굿, 철용굿, 샘굿, 마당밟이, 판굿의 완결된 구조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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