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03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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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代 |
영어공식명칭 | Ancient Time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
시대 | 고대/초기 국가 시대/삼한,고대/삼국 시대/가야,고대/삼국 시대/신라,고대/삼국 시대/백제,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김양훈 |
[정의]
삼한시기부터 남북국시대까지 경상남도 함양지역의 역사와 문화.
[개설]
경상남도 함양군 지역은 사람들이 살기에 적합한 곳으로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고, 삼한시대부터 삼국시대에는 정치체의 성쇠를 다양하게 보여준다. 신라가 통일한 후 남북국 시대에는 하나의 군현이 되어 주변 지역을 관할하는 지방행정 중심지가 되었다.
[삼한시기-변한]
함양지역은 삼한시기 때 변한에 속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변한은 『삼국지』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 한조(韓條)에 의하면, 변한 12국은 중심읍락인 국읍(國邑)과 여러 작은 읍락(邑落)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현재의 함양 지역을 변한 12국 중에 ‘변진주조마국’으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당시 문화의 흔적인 널무덤[목관묘(木棺墓)]도 아직 조사된 바 없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삼한시기의 정치체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 다만 백천리·화산리에서 지석묘가 확인된 점을 보아 청동기시대부터 읍락을 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가야]
삼한 중 마한과 진한은 각각 백제와 신라로 통합·발전하여 고대국가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변한은 가야로 발전하였으나 통합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경상남도 함양군 지역은 가야의 영역으로써 삼한시기보다 한층 발전한 지역으로 변모하였다.
가야와 관련한 문헌에서 함양지역과 관련된 기록은 확인되지 않지만, 곳곳에 분포한 가야 고분군·취락유적 등을 통해 가야사 속의 함양 지역을 살펴볼 수 있다. 그중에 백천리 고분군은 다수의 봉토분(封土墳)과 소형분이 군집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1980년 부산대박물관에서 26기의 고분을 조사하여, 5~6세기대 돌방무덤[석실묘(石室墓)]·돌덧널무덤[석곽묘(石槨墓)]과 200여 점의 토기·철기·장신구를 조사·수습하였다. 또한 취락유적인 화산리 유적에서도 수십 동의 주거지와 다수의 유물을 조사하여, 4세기대 가야의 유적임을 확인하였다.
함양지역의 가야 관련 고고자료는 가야사 속의 함양 지역 정치세력의 성장을 잘 보여준다. 또한 함양의 지리적 위치의 중요성을 잘 알려 준다. 함양 지역의 팔량치 등 고개와 남강 등 하천이 거창·남원·산청 등 주변지역과 연결되어 지정학적 위치로서 탁월한 곳이기 때문이다. 특히 5~6세기대 가라국(加羅國)의 발전은 가라국이 함양 지역을 영역화하면서 호남지역과 남해안 진출이 가능한 데서 이루어진 것이다.
[삼국시대-신라와 백제의 쟁패]
562년(진흥왕 23)에 가라국이 신라에 멸망당하면서 함양지역도 신라의 영역이 되었다. 가야가 멸망된 후 신라와 백제가 옛 가야 지역을 두고 전쟁할 때, 함양 지역은 격전지가 되었다. 당시 함양 지역의 지명은 확인되지 않지만, 『삼국사기』에서 602년(진평왕 24) 아막성 전투와 616년(진평왕 38) 모산성 전투의 양상을 보면 가야의 멸망 이후 함양 지역은 신라의 영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백제가 624년(진평왕 46)에 속함성 등 6성 공격을 감행하여 신라로부터 함양 지역을 빼앗고, 642년(선덕여왕 11)에 대야성 공격에서 신라에 이긴 점을 보면, 백제의 영역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663년에 문무왕이 백제의 거열성을 공격한 점을 보면, 함양 지역이 완전히 신라의 영역이 된 것은 백제부흥군이 멸망한 663년 이후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와 백제가 경상남도 함양 지역을 두고 쟁패한 이유는 앞서 설명한 함양 지역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다. 『삼국사기』에서 7세기 나제 간의 전쟁 당시 함양 지역의 아막성·속함성 등을 언급한 점이 이를 방증한다.
[남북국시대-통일신라]
신라는 삼국통일을 완성한 후 중앙과 지방의 행정개편을 단행하였다. 685년(신문왕 5)에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편성하고, 군현제를 실시하여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였다. 함양 지역은 9주 중 하나인 청주(菁州) 관할이 되었고, 속함군이라고 불렸다. 이후 757년(경덕왕 16)에는 전국적으로 행정명칭과 구역을 개편하면서 청주를 강주(康州)로 바꾸고, 속함군은 천령군으로 변경하여 운봉현을 모산현, 마리현을 이안현으로 고쳐 속현으로 편제하였다.
혜공왕 이후 함양지역은 신라의 왕위계승 다툼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그중 822년(헌덕왕 14) 웅천주 도독(熊川州 都督) 김헌창(金憲昌)이 반란을 일으켜 주변지역을 압박하였다. 이때 완산주(전라북도 전주)의 관리였던 최웅(崔雄) 등은 도망 나와 왕실에 고발하였고, 이에 신라 왕실은 최웅을 속함군 태수로 임명하여 파견시켰다. 신라 왕실에서 최웅을 속함군 태수로 임명한 것은 김헌창의 난을 진압하기보다는 경상북도 경주로 진출하는 길목인 함양 지역을 장악하여 김헌창의 공격을 사전에 대비하는 것이 주요 목적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