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0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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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體育 |
분야 | 문화·교육/체육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정수 |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에서 이루어지는 운동 경기 및 체육 활동과 관련 체육 단체.
[개설]
서산의 체육은 자연적으로 전래되어 오는 전통 체육과 광복 후의 근대 체육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서산의 근대 체육은 1911년 9월 1일 서산초등학교와 1912년 5월 10일 해미초등학교가 개교하면서 근대적 의미의 여러 가지 체육 활동이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체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운동이나 고유 전통 놀이 문화의 한 형태로 전해져온 체육 활동은 여기저기에서 그 흔적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서산 지역에서 많은 활동이 있는 종목인 태권도, 씨름, 택견 등과 기타 집단 놀이나 개인 놀이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현대는 학교 체육과 생활 체육 등에서 많은 사람들의 참여 기회를 확대하고, 이를 통해 건강 증진과 건전한 여가 활동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특히 관전하는 스포츠 행사에서 직접 참여 하는 스포츠 행사로 전환하는 체육 문화로 발전되고 있다.
[근대 체육의 도입과 전개]
서산초등학교[1911], 해미초등학교[1912], 팔봉초등학교[1919], 운산초등학교[1921], 대산초등학교[1922], 부석초등학교[1922], 음암초등학교[1929], 고북초등학교[1930], 지곡초등학교[1930], 인지초등학교[1931], 성연초등학교[1931] 등의 개교와 더불어 서산 지역에 현대적 의미의 체육이 소개되었다. 학교의 개교 시기가 체육 활동에 중요했던 것은 체육이 학교 체육 대회를 통해 축제 분위기 속에서 지역 주민에게 자연스럽게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초등학교 대항 400m 릴레이나 마을 대항 달리기 대회는 그 열기가 엄청났다. 따라서 대회 우승기가 어느 학교와 어느 동리로 가느냐에 따라 그 학교와 그 동리는 그야말로 축제의 장이 되었다. 당시 초등학교 선수들이 붉은 줄이나 흰 줄이 있는 운동 팬티나 러닝셔츠를 입고 달리면 관중들의 감격에 찬 함성이 그치지를 않았다. 또 마을 청년들의 400m 릴레이나 단축 마라톤 또한 그 지역의 체육 활성화에 불을 붙이고도 남았다. 제2차 세계대전[1943~1945]을 전후한 체육 활동은 유일한 운동 시설인 학교 운동장을 식량 증산을 위한 밭으로 이용했기 때문에 암흑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근대 체육의 부활]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면서 각 학교 운동장이 다시 사용 가능하게 되고 축구공과 배구공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서산 체육은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특히 학교, 군청, 금융조합, 경찰서 등 서산읍 지역의 직장이 그 중심에 서 있었으며 그 구성원들을 중심으로 400m 릴레이, 축구, 배구 등의 클럽 활동이 자생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육상은 초등학교 운동회가 열리면 여러 팀이 순회하면서 자율적으로 참여하였는데 그 중에서 서산읍 팀이 두각을 나타냈다. 축구는 해미면, 고북면, 지곡면, 대산읍 등에서 팀이 구성되어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순회 정기전을 가진 바 있다. 당시 서산을 대표하는 선수로는 양관모, 양승백, 윤태선, 이용준, 이강석, 최범수, 방한상 등이 유명하였다. 또한 농림학교 선수로 김길온, 채인식, 장회찬, 최문수, 이인준, 김은석 등이 기능에서 우수하였다.
육상 단거리에서는 김명환[100m 11초 3]이 이름을 날렸고 이외에도 윤태선-윤태빈 형제와 유광규, 라병기 등이 있었다. 김명환은 1949년 100m 달리기 도 대표로 전국체전에 참가하여 준결승까지 진출하였다. 배구는 유형수, 이은섭, 김용갑, 오동희 등이 있었다. 씨름은 최범수, 허선, 김석재, 심현상, 이연동, 정헌제 등의 활약이 컸다. 유도는 서산농림고등학교의 교사이던 이두규의 활약이 컸고 한태희와 한상룡 선수도 유명하였다. 각 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종목은 기마전과 가장 행렬이었는데 특히 서산농림고등학교의 가장 행렬은 서산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현대 체육]
서산은 공주·대전·천안에 비해 체육회 창립[1952]이 비교적 늦은 편이었다. 일제 강점기 정구, 축구, 육상, 씨름 등이 행해지고 있었으나 거의 학교가 중심이 되었다. 따라서 특별한 실적과 기록이 부재한 편이다. 그러나 1962년 「국민체육진흥법」이 제정되고 군수가 당연직 회장을 맡게 됨으로써 발전의 계기를 맞게 되었고, 1964년부터 각종 도 단위 대회에서 상위에 입상하는 회수가 많아지게 되었다.
이후 서산의 체육은 정구, 배구, 씨름, 축구 등이 활성화 되었고 특히 태안여자상업고등학교[현 태안여자고등학교]가 육상 중-장거리에서 김미경을 비롯한 국가 대표급 선수들을 배출하여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1982년 원이중학교가 역전 경주 대회 여중부에서 우승한데 이어 태안여자상업고등학교 팀이 1983년과 1984년 전국 역전 경주 대회 여고부에서 연속하여 패권을 차지하면서 여자 장거리 최고봉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정구에서는 부석중학교와 서령고등학교가 전국 상위팀으로 발돋움하였다. 배구에서는 남면초등학교와 대산초등학교가 있었고, 태안여자상업고등학교가 제3회 KBS배 대회[1981]에서 준우승을 하여 충청남도 배구 활성화에 기여하였다. 축구는 서산초등학교가 전국 대회[1976]에서 준우승을 차지하였고, 야구는 태안중학교 야구팀이 체육부장관기와 전국 체육 대회[1982]에서 각각 우승과 준우승을 하였다. 팔봉중학교 씨름팀은 전국 장사 씨름 대회[1981] 중학부에 우승했으며 해미의 언암초등학교 핸드볼팀이 전국 소년 체전[1982]에서 우승하였다.
이후 서산군 체육회가 1989년 1월 1일 행정 구역 개편으로 서산시, 서산군, 태안군 등 3개 체육회로 분리되면서 서산시의 전력이 약화되었다. 이에 서산시 체육회는 1993년에 규약을 만들어 조직을 정비했으며 1995년 1월 1일 서산시와 서산군이 새로운 서산시로 통합되면서 같은 해 3월 17일 조직을 재정비하였다. 이어 서산시는 1996년 도민 체육 대회에서 준우승을 하는 등 세부 종목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기도 하였다. 현재 서산시의 체육은 학교 체육과 생활 체육 그리고 엘리트 체육이 잘 조화되어 발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