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8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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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閔泰稷 |
영어음역 | Min Taejik |
이칭/별칭 | 순좌(蕣佐),경암(絅庵)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해준 |
출생 시기/일시 | 1868년 - 민태직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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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85년 - 부친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함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 「삼애설」을 지음 |
몰년 시기/일시 | 1935년 - 민태직 졸 |
출생지 | 충청남도 서산시 오남동 |
묘소|단소 |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 금학리 |
성격 | 교육자 |
성별 | 남 |
본관 | 여흥 |
[정의]
근대 충청남도 서산 출신의 교육자.
[가계]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순좌(蕣佐), 호는 경암(絅庵)이다.
[활동 사항]
민태직(閔泰稷)[1868~1935]은 충청남도 서산시 오남동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유진하(兪鎭河)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1885년에 부친상을 당하자 몹시 슬퍼하며 시묘살이를 하였고, 시묘살이 중에도 경서를 탐독하고 예를 강론하였다. 민태직은 근대화와 개항의 물결 속에 점차 옛 풍속이 사라지고 질서가 문란해짐을 탄식하며 윤원구(尹瑗求)와 더불어 향약(鄕約) 10여 조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탄식하고 통곡하며 「삼애설(三哀說)」을 지었다. 이후 민태직은 국권 회복의 길은 다른 무엇보다 인재 양성에 있다고 보고 역량 있는 후학을 교육하는 데 전념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많은 후진들이 배출되었는데, 1998년에 편찬된 『서산시지』에서는 특히 항일 운동가로 유명한 이철영(李喆榮)[1884~1945]을 대표적인 인물로 거론하기도 했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는 『경암문집(絅庵文集)』이 있다.
[묘소]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 금학리에 묘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