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12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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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瑞山海美邑城- |
영어의미역 | Un-san Catholic Church |
이칭/별칭 | 교수목(絞首木) |
분야 | 지리/동식물 |
유형 | 식물/보호수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남문2로 143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성태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8년 4월 10일 - 서산해미읍성회화나무 충청남도 기념물 제172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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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서산해미읍성회화나무 충청남도 기념물 재지정 |
최초 식재 시기/일시 | 1700년 - 회화나무 최초 식재 |
관리 시기/일시 | 1989년 10월 13일 - 부식 부위 대규모 외과 수술 실시 |
관리 시기/일시 | 1989년 10월 16일 - 부식 부위 대규모 외과 수술 완료 |
관리 시기/일시 | 2004년 4월 - 제2차 외과 수술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866년 - 병인 박해기에 천주교인이 나무에서 교수됨 |
소재지 | 서산해미읍성회화나무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남문2로 143[읍내리 32-2] |
학명 | Sophora japonica |
생물학적 분류 | 식물계〉장미목〉콩과 |
수령 | 300년 |
관리자 | 서산시 |
문화재 지정번호 | 충청남도 기념물 |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수령 300년의 회화나무.
[개설]
본래 회화나무[호야나무]는 학자나무로도 일컬어지며, 길상목(吉祥木)으로 여겨져 왔다. 때문에 궁궐이나 서원 혹은 명문 양반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서산 해미읍성(瑞山海美邑城) 안의 회화나무는 그 상징적 의미에 걸맞지 않게 고문과 사형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서산 지역의 사투리인 호야나무로 더 유명한 이 고목에는 천주교 신자들을 묶어 두었던 철사 자국이 최근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형태]
서산해미읍성회화나무는 높이 18m, 가슴 높이 둘레 4.5m이다. 세 개의 큰 가지가 위로 뻗었고, 서쪽으로는 작은 가지 하나만 뻗어 있다. 줄기의 중상부에는 가지가 잘려 나간 것으로 보이는 크고 작은 옹이들이 있는데, 특히 동쪽의 옹이가 크고 선명하다. 줄기의 부식이 심하여 표면의 약 1/3에 해당하는 부분에 외과 수술 흔적이 남아 있다.
[역사/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서산해미읍성회화나무는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기에 천주교 신자를 매달아 고문하거나 처형하는 데 사용된 고목이다. 서산 해미읍성 옥(獄) 앞에 자리 잡고 있었다. 조선 후기 해미 진영(海美鎭營)의 감옥은 천주교 신자들을 수감하던 장소이기도 하였다. 감옥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취조와 회유, 고문이나 처형이 행해지기도 하였는데, 옥 앞의 회화나무도 이러한 사실들과 깊은 연관이 있다.
현재 옹이만 남은 동쪽 가지에 굵은 철사를 매어 놓고 신자들의 머리채를 묶어 매달기도 하였으며, 배교를 거부하던 신자 가운데는 회화나무에서 그대로 교수된 사람도 있었다. 그 이후로 회화나무를 교수목(絞首木)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고매한 선비를 상징하던 옥문 앞의 회화나무는 형벌의 도구이자 박해의 상징인 ‘호야나무’가 되었다. 나무가 품은 역사적 가치를 기리기 위하여 천주교 당국에서는 1975년부터 서산 해미읍성의 회화나무를 보호하기 시작하였다.
[현황]
서산해미읍성회화나무 뒤로는 옥사(獄舍)가 복원되어 처절한 박해의 현장을 재현하고 있다. 신자들을 매달았다는 동쪽의 가지는 1940년대에 훼손되어 옹이만 남았다.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해도 옹이 주변으로 녹슨 철사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가운데 줄기는 1969년 6월 26일 폭풍으로 부러졌으며, 오랜 풍상으로 썩은 줄기의 일부는 2차례의 외과 수술[1989년 10월 13~1989년 10월 16일과 2004년 4월]을 통해 제거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2008년 4월 10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72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남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관리는 서산시에서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