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16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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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별칭 | 호미씻이,백중,꼼비기,풋굿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평생 의례와 세시 풍속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은정 |
성격 | 세시 풍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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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 시기/일시 | 음력 7월 초 중순 |
[정의]
경상북도 의성 지역에서 음력 7월 초중순 무렵 마을 단위로 날을 정하여 하루를 먹고 노는 잔치 풍습.
[개설]
풋구 [호미씻이]는 들판의 잡초[草]를 제거한 다음에 하는 굿[宴]이란 뜻을 가진 것으로 짐작되며 한자로 옮기면 곧 초연(草宴)이 된다. 이 말은 주로 영남 지방, 그것도 경상북도에서 흔히 보이는데, 이 둘은 ‘풋구 먹는다’, ‘풋구 먹이 한다’, ‘풀굿 먹이 한다’, ‘초연 먹는다’와 같이 사용된다. 풋구[호미씻이]는 불교적 의례일로 우란분재(盂蘭盆齋)를 올리던 백중 혹은 도교적 명절이던 칠석이, 조선 후기에 이앙법과 도맥 2작 체계의 성립 이후에 농경 의례일로 바뀐 것이다. 우란분재를 올리던 불교적 의례일이나, 도교적 명절로서 견우직녀의 전설을 간직한 칠석이 중국에서 전래되어 그 자체로서도 명절이었지만, 한국에서는 다른 한 갈래로 풋구[호미씻이]라는 농경의례로 발전 변화되었다. 이러한 풋구는 중국에는 없는 한국 고유의 농경의례이다.
[연원 및 변천]
풋구 가 호미씻이로 명명된 것은, 일 년이라는 영농 주기에서 농작물 재배의 핵심적인 활동의 마지막에 위치하는 작업이 호미를 이용한 김매기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호미씻이는 조선 중기의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데, 전라남도 해남에 살았던 임억령(林億齡)[1496~1568]의 『석천 선생 시집(石川 先生 詩集)』에 ‘세서(洗鋤)’라는 시가 있으니, 이것이 호미씻이에 대한 초기의 기록이다. 조선 전기 『용재총화』를 위시하여 후대의 세시기 저작들에 따르면, 백중일은 농민들의 호미씻이와 관련 없이, 불교적인 의례가 행해진 날이었다고 풀이된다. 조선 후기의 『증보 산림경제』와 『천일록』에 호미씻이가 등장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백중일은 불교적인 의례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조선 후기에 호미씻이가 일반화 된 이유는, 17세기 이래 노동력의 집중도를 증가시킨 이앙법과 도맥 2작 체계라고 하는 답작 농업의 기술과 형태 변화였다. 아울러 공동 작업, 공동 식사, 공동 놀이를 그 기능으로 하는 두레의 성립과 활성화도 호미씻이 형성의 촌락 사회적, 노동 형태적 요인에 따른 것이었다. 물론 호미씻이는 그 이전의 불교 명절이던 백중 혹은 도교 명절이던 칠석이 농경 문화적으로 재편성된 것이라고 하겠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에서는 음력 7월 20일경 세벌 논매기가 끝나면 한 해 동안 수고한 머슴들을 위해서 3~4일 간 마을 공동으로 놀게 해준다. 이것을 풋굿 혹은 풋구라고 부른다. 머슴은 ‘상머슴’과 상머슴의 보조 역할을 하는 ‘곁머슴’으로 나뉜다. 곁머슴은 꼴 베는 일 등 비교적 손쉬운 일을 하기 때문에 ‘꼴머슴’이라고도 부른다. 풋구날은 말하자면 머슴들의 휴가인 셈인데 특히 상머슴은 이날 푸짐한 대접을 받는다. 주인집에서 음식을 마련하고 혹옷을 만들어주거나 돈을 내어주기도 한다. 풋구날에는 찹쌀가루를 빻고 솥뚜껑을 엎어 차노치[찹쌀 노치]를 만들어 상머슴에게 주고 밤새 구울 정도로 준비를 넉넉하게 한다. 이 외에도 수수떡이나 호박을 채 썰어 볶기도 하고 술과 감주도 마련한다. 풋구를 먹는 첫날에는 주인집에서 마련한 음식을 모아 놓고 마을 사람들 모두 한바탕 놀고 다음 날부터는 며칠 간 머슴들이 일손을 놓고 휴가를 즐긴다.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세곡 2리 가늠골에서는 옛말에 ‘아이논[초벌매기], 두불논[두벌매기]매고 세불논[세벌논]까지 매면 문디이[문둥이] 된다’고 전해온다. 그 만큼 김매기의 노동이 얼마나 고단한지를 잘 보여주는 속담인 것이다. 논매기를 마치고 나면 풋굿[풋구]을 먹는데, 이 날을 가늠골에서는 ‘일꾼 생일’이라 부른다. 사촌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찹쌀을 갈아서 기름에 지져낸 찹쌀 노치를 비롯하여 봉투떡[밀전병], 애동 호박[애호박]을 채 썰어서 볶은 것 등 갖가지 음식을 마련한다. 상일꾼에게는 머리를 떼어내지 않은 명태를 온마리[통째]로 주는데 이것이 큰 선물인 셈이다. 가늠골에서 풋굿을 먹을 때에는 당수나무가 있는 조산 거리가 주요 장소였다고 한다.
경상북도 의성군 사곡면 공정 3리 용소 마을에서는 풋구를 호미씻이, 휘초라 부른다. 논매기가 끝나면 논을 관리하면서 벼가 잘 익기를 기다리는데 이때부터 농사일이 수월해지는 시기라 할 수 있다. 음력 7월 중순에 그동안 애썼다는 의미에서 한바탕 크게 노는데 용소 마을에서는 ‘휘초’, ‘회초’, ‘휘초논다’고 전해진다. 이 날을 머슴 생일날이라고 해서 휘초 하기 전 집주인들은 날짜를 정하고 그 날이 되면 머슴들이 논에 모여 큰 머슴은 소를 거꾸로 타고 논둑을 돌고 마을 뒤 ‘뫼펄’에 가서 신나게 논다. 이곳으로 백편, 인절미, 쑥떡, 절편 등 갖은 떡과 전, 손국수, 밥, 돼지고기, 동동주를 마련해서 ‘뫼펄’에 간다. 이 날 머슴들은 음식을 먹고 신나게 노는데 주인들은 계속 음식을 장만하고 대접한다. 따라서 마을 잔치가 되는 셈이다. 1960년대 말까지 사곡면 공정리는 100호가 넘는 큰 동네였고 머슴이 약 10명 정도였다고 한다. 머슴은 큰 머슴과 젖머슴으로 나뉘고 이날 큰 머슴에게는 하복(夏服) 한 벌을 선물해 주기도 한다. 머슴들은 음지 밑에 자리한 당시 마을 부자인 오십 석군 집 초당방에 모여 생활하다시피 하였고 이 집을 ‘큰 머슴 집’이라고 불렀다 한다. 머슴들은 초당방에 모여 새끼 꼬거나 신을 삼고 짚 세공품을 만들었다. 보통 삼동[10월부터 정월까지]에 일 년 동안 신을 짚신을 삼아야 겨울 동안 할 일을 마무리 했다고 보았다. 휘초는 농기계가 도입되기 시작한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중반 이후 사라졌는데, 이때부터 머슴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임노동의 형태가 대신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