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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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丙子胡亂 |
영어공식명칭 | The Manchu War of 1636 |
이칭/별칭 | 병정노란(丙丁虜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재관 |
[정의]
1636년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하여 경상북도 청송 지역을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개설]
병자호란은임진왜란(壬辰倭亂)과 함께 양란(兩亂)이라 불리며, 나라와 백성들에게 미증유의 피해를 입혀 큰 충격을 주었던 전쟁이다. 또한 조선 국왕이 이전까지 오랑캐라 부르며 천대했던 여진(女眞)의 청(淸)나라 황제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표하며 항복했던 치욕적인 전쟁이다. 이후 조선은 청을 임금의 나라로 받들게 되었으며, 청의 연호를 사용하고 조공을 바치는 제후국(諸侯國)이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지금의 경상북도 청송군 지역으로는 적군이 침입하지 않았지만, 청송 출신의 많은 무관과 의병들이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활약하였다.
[역사적 배경]
후금(後金)과의 중립적인 외교 대응을 통해 그들의 침입을 막고자 했던 광해군(光海君)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축출한 서인(西人)들은 광해군 때의 대외 정책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후금과의 관계를 끊는 한편, 비밀리에 명(明)의 장수 모문룡(毛文龍)을 지원하는 등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명나라에 대한 공격에 앞서 배후의 위협을 제거할 필요가 있던 후금이 1차 조선을 침입하였다. 이것이 1627년(인조 5)에 발발한 정묘호란(丁卯胡亂)으로 전쟁에 대한 제대로 된 준비가 없이 무방비 상태나 마찬가지였던 조선은 후금에 패배를 당하고 ‘형제의 의’를 맺음으로써 일시적으로 전쟁이 종결되었다. 이후 조선은 후금과 무역뿐만 아니라 일정한 정도의 공물을 바쳐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1632년(인조 10) 후금은 만주 전역을 석권하고 명나라 북경(北京)을 공격하면서, 친명 정책을 취하는 조선을 더욱 견제하게 되었다. 특히 그들 내부에는 명나라에 대한 공격에 앞서 배후의 안정을 위해 조선을 굴복시킬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후금은 양국 관계를 형제지국(兄弟之國)의 대등한 관계에서 군신(君臣)의 관계로 고칠 것과 황금(黃金)·백금(白金) 1만 냥, 전마(戰馬) 3,000필 등의 세폐(歲幣), 정병(精兵) 3만을 요구함으로써 조선에 명과 청에 대한 선택을 강요하였다.
한편 1636년(인조 14) 4월 후금의 태종(太宗) 홍타이치[皇太極]는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청(淸)이라 고쳐 제국으로서 면모를 일신하고, 이 자리에 참석한 조선의 사신에게 왕자를 볼모로 보내서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공략하겠다고 협박하였다. 이와 같은 청나라의 무리한 요구는 척화(斥和) 의지가 고조되고 있는 조선에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1636년 11월 선양[瀋陽]에 온 조선 사신에게 청 태종은 재차 왕자, 대신(大臣), 척화론자를 인질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이러한 청의 무리한 요구를 거부하였고, 양국 관계는 전쟁이라는 방법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다. 결국 1636년 12월 청은 10만 명 규모의 부대를 편성하여 두 번째로 조선에 침입함으로써 병자호란이 개전(開戰)되었다.
[경과]
1636년 12월 2일 청나라 태종이 청, 몽골[蒙古], 한인(漢人)으로 편성한 10만 대군을 스스로 거느리고 수도(首都) 선양을 떠나,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청의 선봉대는 산성 등을 근거지로 수비에 들어간 조선의 방비책을 뚫고 한양(漢陽)으로 진격하였으며, 조선 조정에서는 13일에서야 청나라 군의 침입 사실을 알았다. 12월 14일 청나라 군은 개성(開城)을 통과하여 한양 외곽에 이르렀다. 인조는 강화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여의치가 않아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백관을 거느리고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하였다.
그러자 각지의 근왕병(勤王兵)들이 경기도 광주(廣州) 쪽으로 집결하였고, 국난 극복을 위해 청송과 진보 지역을 위시한 조선 전 지역에서 의병이 창의하여 나라를 지키는 데 헌신하였다. 이때 경상도 지역에서 올라간 창의군이 포함된 근왕병은 두 갈래로 진격하였는데,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 허완(許完)이 지휘하는 일군과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민영(閔栐)이 지휘하는 일군이었다. 두 병력은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경기도 광주의 쌍령(雙嶺)에서 청군과 맞부딪치게 되었다. 허완은 미처 적과 접전하기도 전에 일군이 패하여 전사하였으며, 민영은 휘하의 군사를 독전하여 오랜 시간 사력을 다하여 싸웠으나 마침내 힘이 다하여 일군이 대패하고 자신도 전사하였다.
이렇듯 조선 각지에서 관군과 의병들이 남한산성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갔지만, 청군을 물리치지도 남한산성의 포위도 풀지 못하게 되었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던 인조와 조선 조정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결국 청에 화해를 청했다. 조선은 인조가 직접 청 태종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 절차를 거쳐 청과 강화를 맺었다.
[결과]
병자호란의 발발로 인조가 남한산성에 갇히는 등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청송 지역에서도 분연히 일어나 창의하여 전투에 참전하거나, 수절(守節)을 위해 지역 내에서 은거하여 절의를 지키고자 하는 인사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윤충우(尹忠祐), 권일륵(權日玏), 심예달(沈禮達), 황극일(黃克一) 등은 직접 전투에 참가한 인사들이며, 고응섭(高應涉), 신기(申機), 김몽추(金夢鰍), 박함(朴涵) 등은 은거하여 절의를 지킨 대표적인 수절인사(守節人士)들이다. 특히 윤충우, 권일륵은 경기도 광주의 쌍령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적과 싸우다 순절하여 유교 사회에서 물려받은 충(忠)과 의(義)를 앞장서 실천하였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에 윤충우는 봉훈랑(奉訓郞)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에 증직(贈職)되었을 뿐만 아니라, 1808년(순조 8) 윤충우의 충의를 기리기 위하여 지금의 청송읍 금곡리에 상렬사(尙烈祠)를 건립하고 위패(位牌)를 배향하였다. 권일륵은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되었다.
[의의와 평가]
병자호란에 직면한 경상북도 청송 지역의 인사들이 직접 의진(義陣)에 참여하여 전투에 참여하거나, 은거하여 절의를 지키는 등의 방식으로 충과 의를 앞장서 실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