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1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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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寺刹 |
영어공식명칭 | Buddhist Temple |
이칭/별칭 | 절,가람,범우,사원,승원,정사,승사,사우,범찰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병선 |
[정의]
경상북도 청송군에 있는 부처를 숭상하고 불법을 익히는 장소.
[개설]
사찰은 원래 석존(釋尊)의 설법을 위한 장소로서 건설되었지만, 승단이 형성됨에 따라 안거(安居)를 위한 공동의 방사(房舍) 성격을 띠게 되었다. 청송 지역의 사찰 수는 2018년 현재 51사(寺)로 파악되었다. 이 중에서 조계종 종단 소속 사찰이 절반을 조금 넘고, 나머지는 태고종, 천태종, 법화종, 선교종, 원융종, 염불종, 대각종, 관음종, 총화종, 국제도덕협회, 덕도유지재, 무소속 및 소속이 불분명한 것 등이다. 이들 사찰 가운데 전통 사찰은 대전사(大典寺), 보광사(普光寺), 수정사(水淨寺) 정도이고, 모두 조계종 종단 소속이다.
[사찰의 구조]
사찰의 주요 구조물은 금당(金堂)과 사리(舍利)를 모신 탑(塔)이므로, 사찰 구성도 탑과 금당을 중심으로 배치된다. 탑이 불전과 일직선상에 놓여 있으면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 가람 배치, 두 탑이 불전에서 동서로 대칭하여 세워지면 쌍탑식(雙塔式) 가람 배치, 탑이 하나에 금당이 셋일 경우에는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堂式) 가람 배치라 한다. 탑이 예배의 주 대상이 될 때에는 일탑식으로 배치하였고, 불상이 주된 예배 대상으로 될 때는 쌍탑식 가람 배치를 취하였다.
우리나라의 사원은 불전 중심으로 된 가람 배치가 대부분이다. 삼국시대에는 중앙에 하나의 탑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가람 구성을 보이다가 통일신라시대에 탑이 두 개로 분화되는 이탑식 가람으로 변하였다. 고려시대부터는 풍수지리설과 선종 등의 영향으로 산지가람(山地伽藍) 배치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전통적인 일탑일금당식이다. 이는 조선시대까지 지속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산지가람 배치가 성행하게 되어 변형이 불가피하게 되었는데, 인왕문(仁王門), 천왕문(天王門) 등을 배치하고, 탑과 주불전을 중심으로 하여 누각이나 기타 건물들을 그 둘레에 배열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평지가람(平地伽藍)은 평지에 세워진 사찰을 말하는데, 건물 배치 방식이 궁궐 건축의 중문(中門), 정전(正殿), 회랑(回廊) 등과 비슷해서 궁궐만큼이나 질서 있고 당당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산지가람은 산중에 터를 잡은 사찰을 말한다. 산지가람은 기본적인 가람의 질서를 존중하되, 산세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지형 조건에 맞추어 그 안에 부속건물을 조성하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우리나라 사찰 대부분은 이러한 산지가람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청송군에 분포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찰도 산지가람 형태이다.
[청송 지역의 사찰]
대전사(大典寺)는 창건에 관한 명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672년(문무왕 12)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설과 892년(진성여왕 6)에 낭공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설, 그리고 919년(고려 태조 2)에 눌옹(訥翁)이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대전사라는 사찰 명칭이 기록으로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1976년 보광전(普光殿) 중수 과정에서 발견된 1672년의 「대전사법당상량문(大典寺法堂上樑文)」이다. 상량문을 제외하고 대전사라는 명칭이 등장하는 가장 이른 기록은 『영남일기(嶺南日記)』[1708년]이다. 따라서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세종[재위 1418~1450]의 비 소헌왕후(昭憲王后)와 명종의 비 인순왕후를 배출한 공로로 대전사가 왕실의 원찰로 지정되어 국가적 보호를 받았으며, 임진왜란 등 전란으로 사찰이 전소되자 1672년에 다시 중창하였다.
19세기 말엽에 이르면 대전사의 사세(寺勢)가 쇠락하여 1884~1894년까지 10년 동안 세 차례나 조정으로부터 완문(完文)[조선시대에 해당 관아에서 발급하던 증명 또는 허가 문서]을 받아 잡역 등을 면제 받아 사찰을 지탱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1976년 이후 여러 차례 중수를 하여 지금은 청송 지역에서 가장 사세가 큰 전통 사찰로 발전하였다. 대전사의 주요 건축물에는 보광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산령각, 봉향각, 수선당, 관음전, 탐진당, 심검당, 회연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4기의 부도와 삼층석탑도 자리 잡고 있다.
보광사(普光寺)는 672년 의상대사가 세웠다는 설과 조선 세종의 비 소헌왕후의 조상의 묘를 수호하기 위해 세웠다는 설이 전하나 모두 확실하지 않다. 조선 세종 때 소헌왕후 심씨가 조상의 묘가 보광사 근처의 산에 있다고 하여 원당으로 삼고 재실인 추모재(追慕齋)와 만세루(萬歲樓)를 건립하였다고 하나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보광사 극락전 보수 공사 중에 발견된 상량문에는 1615년(광해군 7)에 건축되었다는 사실로 보아 적어도 17세기경에 창건되었으리라 짐작된다. 극락전은 1979년에 중수하였으며, 2018년 문화재청과 청송군에 의해 보광사 극락전 정밀 실측 조사가 완료되었다. 보광사의 주요 건축물로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만세루, 산신각, 추모재의 현판을 그대로 단 요사채와 삼층석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정사는 주변 경치가 아름답고 산속에서 흘러내리는 샘물과 계곡에 흩어진 돌이 수정과 같이 깨끗하다고 해서 수정사라 하였다. 고려 공민왕 때 나옹대사(懶翁大師)가 창건하였으며, 조선시대에 중건한 사찰이라고 하나,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수정사에 관한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처음으로 등장하고 이후 각종 읍지류 진보현조에 기록되고 있음을 보아 고려 말부터 조선 초 사이에 건립된 사찰로 추정할 수 있다. 대웅전(大雄殿) 보수 공사 당시 발견된 상량문에 ‘강희(康熙) 54년 을미(乙未) 3월 18일 상량(上樑)’이라고 적힌 것을 미루어 1715년(숙종 41)에 대웅전이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수정사의 건축물로는 대웅전을 비롯해서 적묵당(寂默堂), 산신각, 요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왕암(周王庵)은 대전사의 산내 암자로 대전사와 동일한 시기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16세기 중·후반에 쓰여진 『주왕전(周王傳)』과 『주왕사적(周王事蹟)』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인 주왕, 대전도군, 백련공주 등의 이름이 현재 주왕암, 대전사, 백련암 등으로 사용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주왕암은 16세기 전반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주방사로 기록된 이후 주왕사로, 다시 주방사로 불리다가 1937년 『청기지(靑己誌)』와 『청송군지(靑松郡誌)』에 주왕암으로 다시 등장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입구의 가학루(駕鶴樓)와 16나한이 봉안된 나한전과 요사로 구성되어 있다.
역시 대전사의 산내 암자인 백련암(白蓮庵)도 창건 설화는 대전사나 주왕암과 동일하다. 다만 1773년에 간행된 반계 이양오(李養吾)의 『주왕산록(周王山錄)』에 따르면, “대전사에서 개울 건너 있는 백운암이 보인다.”고 하였는데, 대전사에서 바라볼 수 있는 암자는 현재의 백련암밖에는 없으므로 백운암과 백련암이 같은 암자임을 알 수 있다. 백련암의 명칭이 처음 기록된 것은 1937년에 간행된 『청기지』와 『청송군지』이다. 따라서 백련암은 대전사가 재창되는 17세기경에 함께 창건되었고 19세기 말 대전사가 쇠락할 때 퇴락하였다가 20세기에 들어와 재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당우로는 주전(主殿)인 화엄대강당(華嚴大講堂)과 산왕각(山王閣). 설향실(雪香室), 요사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청송 지역 사찰의 문화재]
대전사의 문화재는 보물 제1570호로 지정된 청송 대전사 보광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56호로 지정된 대전사 보광전 석조여래삼존상,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69호로 지정된 대전사 명부전 지장삼존 및 시왕상이 있으며,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68호로 지정된 대전사 명부전 지장탱화는 2016년 탱화 보존을 위한 긴급 보수 공사를 하기도 하였다. 또 보광사의 문화재로는 보물 제1840호로 지정된 청송 보광사 극락전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09호로 지정된 청송 만세루가 있다. 한편, 수정사에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73호로 지정된 수정사 대웅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