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294 |
---|---|
한자 | 契丹二次侵略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김우택 |
[정의]
고려 전기 거란[契丹]이 고려를 침입하여 현종(顯宗)이 피난하면서 서울특별시 도봉구에 있는 도봉사를 지나가는 계기를 마련한 전쟁.
[개설]
거란 2차 침략 은 1010년(현종 원년) 12월에 거란이 고려에서 발생한 강조(康兆)의 난을 구실로 삼아 황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침입한 전쟁이다. 이로 인해 고려의 수도 개경(開京)이 함락되어 국왕 현종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으나, 현종의 친조(親朝) 제안으로 거란군이 철수하였다.
[역사적 배경]
고려와 거란은 993년(성종 12)에 벌어진 1차 전쟁의 결과로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체결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는 송(宋)과 단교하고 거란에 조공을 바치며, 대신 압록강(鴨綠江) 동쪽까지의 영유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잠시 안정을 찾았던 양국 관계는 1009년(목종 12)에 고려에서 강조의 난이 일어나 목종(穆宗)이 폐위되고 현종이 즉위한 사건이 구실이 되어 다시 전쟁으로 악화되었다. 여기에는 1004년(목종 7)에 거란이 송을 제압하고 ‘전연지맹(澶淵之盟)’을 체결한 점, 그리고 거란과 고려 사이에 살던 일부 여진(女眞) 부족과 고려의 갈등 등 국제 정세의 변화가 많은 영향을 미쳤다.
[경과]
1009년에 현종이 즉위한 뒤로 거란에서는 이를 계속 문제 삼았다. 고려는 이를 외교적으로 무마하려 하였으나, 결국 거란은 1010년(현종 원년) 11월에 황제가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대대적으로 고려를 침입하였다. 고려에서는 강조가 군을 이끌고 맞아 싸웠으나, 대패하여 전선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에 현종은 신하들과 함께 개경을 탈출하여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게 되었다.
피난 도중 현종은 하공진(河拱辰) 등 주요 신하들과 도봉사에서 만나 대열을 다소 정비할 수 있었고, 강화 협상을 위해 하공진을 거란 진영에 파견하였다. 거란은 북방에 잔존한 고려군의 기습으로 피해가 누적되는 상황에서 고려가 국왕의 친조(親朝)를 제안하자 이를 수락하고 철군하였다. 그러나 북방에 남아 유격 작전을 펼치던 양규 등은 공세를 계속하여 거란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결과]
종전 후 고려는 국왕의 병환을 이유로 친조를 거부하였다. 이에 거란은 1차 전쟁 당시 고려의 영유권을 인정했던 압록강 이동의 지역, 이른바 ‘강동 6주(江東六州)’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고려는 이를 거부하였고, 이후 3차 전쟁까지 이는 지속적인 분쟁의 대상이 되었다.
[의의와 평가]
강조의 패전으로 주력 부대가 무너지자 고려 조정은 크게 당황하였다. 강조의 정변으로 목종이 폐위되고 현종이 즉위하여 정국이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서 수도를 버리고 피난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피난 시 현종은 여러 차례 목숨에 위협을 느낄 정도로 험난한 여정을 겪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도봉사에서 일행을 정비하고 하공진 등과 합류한 것은 이후의 강화 협상 및 종전 과정에서 중요한 전기(轉機)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