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6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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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智蔡文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김우택 |
활동 시기/일시 | 1010년 12월 - 지채문 거란의 2차 칩임 시 현종 호위하여 도봉사(道峯寺)에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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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026년 - 지채문 졸 |
추모 시기/일시 | 1031년 - 지채문 현종(顯宗) 호종의 공으로 1등 공신에 추록 |
부임|활동지 | 도봉사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 1동 494-1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봉주(鳳州) |
대표 관직 | 좌복야 |
[정의]
고려 전기 2차 거란 침략 당시 현종을 호위하여 도봉사로 인도한 무신.
[개설]
지채문(智蔡文)[?~1026]은 봉주 지씨(鳳州智氏)의 시조이다.
[활동 사항]
지채문은 1010년(현종 원년) 중랑장에 임명되었다. 이 해 거란이 2차 침략을 단행했는데, 당시 화주(和州)에 주둔하여 동북면을 방어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이후 강조(康兆)가 이끄는 고려의 주력군이 패하여 서경이 위험해지자 서경 방어를 지시받았다. 지채문은 거란의 항복 요구에 동요하는 서경의 민심을 수습하고 항전 태세를 갖추었고, 탁사정(卓思政) 등과 함께 서경을 둘러싼 거란군과 전투를 벌여 성과를 거두었으나 전황이 불리해지자 개경으로 돌아와 이를 보고하였다.
지채문의 보고를 받은 고려 조정은 항복을 논의하였으나, 강감찬(姜邯贊)의 건의에 따라 일단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기로 하였다. 지채문은 국왕의 호위를 자청하여 현종의 남행을 이끌었다. 현종은 피난 도중 여러 차례 위기를 겪었는데, 적성현(積城縣)[현 경기도 연천]에서는 무졸(武卒) 견영(堅英) 등이 행궁을 공격하려 하였고, 창화현(昌化縣)[현 경기도 의정부시]에서는 그 지역 향리가 왕을 위협하였다. 당시 현종을 호위하던 대부분의 신료들은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도주하였으나, 지채문은 직접 현종의 말을 몰아 도봉사로 일행을 안전하게 인도하고, 소수의 신하들과 함께 끝까지 현종을 호위하였다. 도봉사는 고려 광종 때 국사였던 혜거(惠居)가 창건한 사찰로서, 이후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의 일부가 이곳에서 제작되었다.
이후에도 지채문은 피난 과정에서 실종된 왕비 일행을 수색하여 모셔 오고 휘하 장졸에게 상을 내리도록 건의하여 사기(士氣)를 높였으며, 전주 절도사 조용겸(趙容謙)의 위협을 막아 내는 등 피난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 공으로 현종으로부터 전지 30결을 포상으로 받았으며, 이후 우상시(右常侍)와 우복야(右僕射)를 제수 받았다. 증손자 지녹연(智祿延)도 충신으로서 인종 때 권신 이자겸(李資謙)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죽임을 당한 사실이 『고려사(高麗史)』 열전에 실려 있다.
[상훈과 추모]
1031년(덕종 즉위년) 현종 피난 시 호종한 공으로 1등 공신에 추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