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04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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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利仁戰鬪 |
영어의미역 | Battle of Ii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이인면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경수 |
성격 |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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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1894년 10월 23일 |
종결연도/일시 | 1894년 10월 23일 |
발생(시작)장소 | 이인[충청남도 공주시 이인면] |
관련인물/단체 | 전봉준(全琫準)[1855~1895]|최시형(崔時亨)[1827~1898]|손병희(孫秉熙)[1861~1922]|손화중(孫華中)[1861~1895]|동학농민군|관군|일본군 |
[정의]
1894년(고종 31) 11월 19일 충청도 공주 이인역에서 동학농민군과 관군 및 일본군의 연합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
[역사적 배경]
1894년 정월 전라도 고부봉기로부터 시작된 제1차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 5월 관군과의 전주화약을 계기로 일시적인 휴전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전라도 전역에 집강소(執綱所: 동학농민운동 때 농민군이 전라도의 각 군현에 설치하였던 농민 자치 기구)를 설치하고 개혁 정치의 실현을 꾀하던 전봉준(全琫準)은 일본군이 궁궐을 침범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청·일 양국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등의 소식을 듣자, 폐정 개혁을 논할 때가 아니라 항일 투쟁을 벌일 때가 왔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추수가 끝나는 9월에 접어들자 전봉준은 전주에서, 손화중(孫華中)은 광주에서 궐기하였으며, 호남·호서의 동학교도와 농민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또한 무력 항쟁에 부정적 반응을 보이던 동학의 제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도 지지를 선언하고 손병희(孫秉熙)로 하여금 동학군을 이끌고 전봉준을 돕도록 하였다.
전봉준은 전주 삼례(參禮)를 동학 농민군의 근거지로 삼고 대군을 인솔, 일단 논산에 집결한 뒤, 공주, 수원을 거쳐 서울을 공격할 계획을 세운 후 3방향으로 나누어 공주로 진격하였다. 한편,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조정과 일본은 2,500여 명의 관군과 일본군을 급파하여 동학농민군이 공주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상당한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경과]
논산에서 공주로 진격하던 동학농민군 중 전봉준의 주력 부대는 이인역(현 이인면)에 이르렀고, 전봉준이 직접 이끈 다른 부대는 효포에 다다랐으며, 또 다른 부대는 공주 동쪽 30리 지점인 대교로 나아가 공주를 포위하였다.
당시 이인역과 효포는 관군이 지키고 있었고 일본군은 우금치에 진을 치고 있었다. 『공산초비기(公山剿匪記)』에는 관군의 선봉장이었던 이규태(李奎泰)가 당시 동학농민군의 모습에 “적은 건너편 봉우리에 있었는데 깃발이 무수히 꽂혀 있는 것이 가로로 수십 리에 달하였고, 산에 올라와 있는 자들은 서있는 것이 병풍을 둘러친 것 같았다.”고 감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결전의 서막은 11월 29일 이인역에서 올랐다. 이날 농민군은 이인역 주변의 산에 웅거해 있었는데, 일본군 100여 명과 성하영, 윤영성이 이끄는 관군이 3면으로 산을 오르면서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고 있던 농민군은 포를 쏘고 집중사격을 하면서 완강히 저항하였다. 많은 사상자를 내고 날이 저물자 관군과 일본군은 결국 공격을 단념하고 퇴각하였다.
[결과]
이인 전투는 공주에서 농민군과 관군 사이에서 벌어진 최초의 전투로서 농민군은 120명의 적을 섬멸하고 300여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인 전투는 동학 농민군이 공주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 이후 농민군은 효포, 웅치에서 관군, 일본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그러나 우금치 전투에서 월등한 관군과 일본군의 화력 앞에 최종적으로 패배함으로써 결국 제2차 동학농민운동은 동학 농민의 염원을 달성하지 못하고 막을 내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