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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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한 생계에서 시작된 도부꾼을 17년 동안 지속하였으며, 그리고 딸 일곱을 키워냈다. 밑천이 없어 어렵게 시작한 장사는 점점 규모가 커지고 돈벌이도 괜찮아 그럭저럭 먹고 살 만하였고 욕심도 커져갔다. 해산물을 가득 실은 보따리 하나 정도는 그 크기가 점점 커져 오징어를 두 가마니씩 장날에 맞추어 화물로 보내고 미역도 한 동이씩 옮겨가고 꽁치는 한 광주리씩 싣고 가는 등 규모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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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지역에 분포하는 산등성이와 봉우리 사이가 낮은 지형. 울진군의 지형은 태백산맥과 태백산맥 동록의 해안저지로 대별될 수 있다. 또한, 태백산맥은 지형적 특성에 의해 다시 중앙산맥과 해안산맥으로 구분된다. 이중 중앙산맥은 온정리-매화천-울진을 연결하는 구조선 서쪽에, 해안산맥은 그 동쪽의 산열을 의미한다. 한편, 해안저지는 태백산맥이 동편에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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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금강송면 광회리 외광비마을에 있는 성황신을 모셔놓은 제당. 경상북도 울진군 금강송면 광회리에는 자연마을인 덕구바우골·외광비마을·내광비마을·갈전동이 있는데, 각 마을마다 제당 형태의 성황당이 있다. 광회리에 있는 이들 자연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대보름에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서낭제사를 지내고 있다. 울진군 금강송면 광회리 외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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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살에 시집와서 나이 마흔에 남편을 잃었다. 가정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남편이 잃고 나니 그 빈자리가 크게 다가온다. 그리고 당장 먹고 살길이 또 막막해질 때 할 수 없이 다시 거리로 나갔다. 당시 생필품으로 팔리던 사카린, 성냥, 술약, 비누, 실 같은 물건을 사서 가까운 범상골, 섭실, 화성리를 돌아다니며 팔기 시작하였다. 장사가 되지 않아 고기장사를 따라다니면서 죽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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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교감으로 승진하면서 농악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고, 울진군 내 농악을 보급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각급 학교에 농악을 보급하기 위해서 노력하였고, 1988년 정년 퇴임 후에는 본격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십이령바지게꾼놀이를 발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북면에서 생활하면서 당시 선질꾼이라 불리는 바지게꾼들을 익히 보았던 그는 집 앞을 지나가는 바지게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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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과 내륙 지방의 장시를 오가던 보부상들이 십이령을 넘나들며 부르던 노래와 놀이. 십이령바지게꾼이라 하면 바지게라는 지게에다 바다에서 생산되는 소금, 고기, 미역 등 해산물을 싣고 흥부장(興富場)[현재 북면 부구리]에서 출발하여 십이령[쇳칫재, 세고개재, 바릿재, 셋재, 너삼밭재, 젖은텃재, 작은넓재, 큰넓재, 꼬채비재, 멧재, 배나들재, 노룻재 등] 12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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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두천리에 있는 선질꾼 정한조와 권재만을 기리는 쇠로 만든 비. 조선 말기 선질꾼들은 2·7일장인 울진장과 3·8일장인 흥부장에서 주로 해산물인 소금·건어물·미역 등을 구매하여 쪽지게에 지고 십이령을 넘어 봉화장으로 가서 그 주위의 내성장·춘양장·법전장·재산장 등에서 잡화와 약품 및 양곡·포목 등을 물물 교환하여 되돌아왔다. 또한, 봉화 지역에서도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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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전반 서울에서 봉화에 이르는 길이 간선도로로 승격되어 7대로가 형성되면서 울진군 북면에서 봉화를 연결하는 교통로인 십이령 길이 동서를 연결하는 대표 도로가 되었다. 울진의 흥부장·읍내장·봉화의 내성장 등 장시가 열리면서 이들 장시가 십이령 길을 통해 연결되었다. 십이령을 넘나들며 울진과 봉화 지역의 장시를 장악하였던 보부상이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퇴조하자 그 역할을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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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령 고개길은 자동차만 다닐 수 없는 길이다. 1968년 울진·삼척에 무장공비가 침투했을 때 이를 소탕하기 위해 미군들이 지도를 들고 두천에 와서 길을 찾았다고 한다. 분명 지도에는 길이 있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자동차가 갈 수 있는 길이 없다. 십이령 고개길은 사람이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다니는 짐만이 오고가는 그런 길이었다. 선질꾼들은 흥부장과 울진장에서 생산된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