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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801705
영어의미역 The Life of Peddlers Crossing Twelve Paths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도현

[정의]

19세기 전반 서울에서 봉화에 이르는 길이 간선도로로 승격되어 7대로가 형성되면서 울진군 북면에서 봉화를 연결하는 교통로인 십이령 길이 동서를 연결하는 대표 도로가 되었다. 울진의 흥부장·읍내장·봉화의 내성장 등 장시가 열리면서 이들 장시가 십이령 길을 통해 연결되었다. 십이령을 넘나들며 울진과 봉화 지역의 장시를 장악하였던 보부상이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퇴조하자 그 역할을 대신한 대표적인 행상단이 선질꾼이다.

선질꾼은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점점 없어졌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혼란과 무장 공비 출현으로 인한 산간 지역 주민들의 소개, 그리고 교통망 정비로 도로가 많이 개설되고 버스가 다님에 따라 바지게에 물건을 지고 다니며 장사하는 것이 더 이상 시대에 걸맞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국도 36호선 개설과 확충으로 십이령이 더 이상 울진과 봉화를 연결하는 주요 도로로 기능할 수 없게 된 것도 요인이다.

[울진 지역의 옛 교통로]

조선 후기에 울진에서 외부로 향하는 길은 북쪽·서쪽·남쪽·동쪽의 네 방향의 길이 있었으나, 동쪽 방향은 바다를 향하기에 육지를 연결하는 길은 실제로는 세 방향이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있는 울진의 도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관문으로부터 동쪽으로 현내진(縣內津)까지 5리이고 대해(大海)에 이른다. 관문 서쪽으로 두천원까지 30리이고, 두천원으로부터 소조원까지 40리이다. 소조원으로부터 안동부 경계에 있는 광비원까지 30리이다. 광비원으로부터 길은 경상도에서 충청도에 이른다. 관문으로부터 남쪽으로 수산역까지 7리이고, 수산역으로부터 덕신역까지 30리이다. 덕신역으로부터 평해군 경계 남쪽으로 망양정까지 10리이다. 망양정으로부터 평해군까지 40리 길이고, 경상도로 향한다. 관문으로부터 북쪽은 흥부역에 이르는데 40리이다. 흥부역으로부터 삼척부 갈령까지 10리이고, 갈령 북쪽으로부터 삼척부 100리 길을 넘어 함경도를 향한다.”

위의 기록을 보면 울진에서 외부로 향하는 길은 백두산에서 시작하는 백두대간이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삼척의 매봉산에서 갈라져 나온 낙동정맥의 오른쪽으로 형성된 남북 방향의 도로와 북면 흥부에서 출발하여 십이령을 넘어 봉화·영주로 향하는 동서 방향의 도로가 주축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서 방향의 도로는 낙동정맥에서 갈라져 나온 아구지맥을 두 번 넘고, 낙동정맥 상에 있는 백병산 옆을 돌아서 봉화로 향하고 있다.

이와 같이 형성된 도로를 중심으로 역과 원이 조선 전기부터 만들어져 운영되었으며, 각종 지리지에 기록된 역의 연결망은 삼척의 옥원역(沃原驛) - 흥부역(興富驛) - 덕신역(德神驛) - 수산역(守山驛) - 평해의 달효역(達孝驛)인데, 모두 남북 방향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에 비해 각종 지리지에 기록된 울진의 원의 연결망은 가을원(加乙院) - 두천원(斗川院) - 소조원(召造院) - 광비원(廣庇院) - 봉화의 장불원(長佛院) 인데, 모두 동서 방향으로 연결되어 있고 십이령을 지나는 도로에 연해 있다.

십이령 상에 있는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현지 조사에서도 암행어사들이 십이령을 지나며 묶었던 장소가 두천원·소조원·광비원이며, 과거를 보거나 관리들이 한양으로 오가는 길도 이곳이었다는 것으로 보아 울진 지역의 동서 교통로의 주축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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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울진 봉화 지역의 역과 원(평해 지역 제외)

[동서 교통로의 주축, 십이령 길]

울진에서 동서 방향을 연결하는 주도로인 십이령 길은 출발 지점이 울진·죽변·흥부에서 각각 시작된다. 출발 지점에 따라 노정에 약간의 차이를 보이나 결국 북면 두천리를 지나 바릿재와 샛재를 거쳐 봉화로 향하는 길은 같다. 각각의 출발 지점에 따른 노정은 다음과 같다.

1. 울진에서 출발: 울진 - 구만리 - 외고개 - 천고개 - 바릿재 - 샛재 - 너삼밭재 - 저진터재 - 새넓재[적은넓재][한나무재] - 큰넓재 - 고채비재 - 맷재 - 배나들재 - 노룻재 - 소천

2. 죽변에서 출발: 울진 죽변 - 돌재 - 나그네재 - 바릿재 - 샛재 - 너삼밭재 - 저진터재 - 새넓재[적은넓재][한나무재] - 큰넓재 - 고채비재 - 맷재 - 배나들재 - 노룻재 - 소천[죽변에서도 선질꾼들은 주로 쇠치재를 넘는 십이령 길을 택해 왕래하였다고 한다.]

3. 흥부에서 출발: 울진 흥부 - 쇠치재 - 세고개재 - 바릿재 - 샛재 - 너삼밭재 - 저진터재 - 새넓재[적은넓재][한나무재] - 큰넓재 - 고채비재 - 맷재 - 배나들재 - 노룻재 - 소천

십이령 상의 주요 지점인 바릿재에서 샛재까지는 30리이고, 말래[두천리]에서 자면 느삼밭에서 점심을 먹는다고 하였다. 이 길은 당시 대로(大路)여서 혼자 다닌 사람들도 있었는데, 혼자 다니다가 봉변을 당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울진·봉화 지역의 장시와 특산물]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봉화의 특산물로 토의(土宜)는 벼·기장·조·보리·왕골이고, 토공(土貢)은 꿀·밀[黃蠟]·여우 가죽·노루 가죽·산달피(山獺皮)·돼지털·자리[席]·칠·잣이며, 약재(藥材)는 웅담(熊膽)·인삼·백복령, 토산(土産)은 신감초(辛甘草)·송이버섯·은구어이다.

울진에서 토의는 오곡과 뽕나무·삼·감·밤·배·닥나무이고, 토공은 꿀·밀[黃蠟]·철(鐵)·호도·석이·오배자(五倍子)·조피나무열매[川椒]·미역·칠·사슴포·여우 가죽·삵괭이 가죽·노루 가죽·범 가죽·돼지털·대구·문어·숭어·전복·홍합이며, 약재는 복령·승검초 뿌리[當歸]·바디나물 뿌리[前胡]·대왕풀[白芨]·오미자·인삼이겨, 토산은 가는 대와 왕대이며, 염분(鹽盆)이 61곳이고, 자기소(磁器所)가 1곳이다.

이와 같은 특색을 가진 지역 특산물과 곡물·어류를 조선 후기 지방 장시의 발달과 교통로의 확보로 울진과 봉화에서는 십이령 길을 통하여 물자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교류는 5일장 형태로 운영되던 장시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장시와 관련하여 이 지역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전 민요가 전한다.

“미역 소금 어물 지고 춘양장은 언제가노/ 대마 담배 콩을 지고 울진장을 언제가노/ 반 평생을 넘던 고개 이 고개를 넘는구나/ 서울가는 선비들도 이 고개를 쉬어 넘고/ 오고 가는 원님들도 이 고개를 자고 넘네/ 꼬불꼬불 열 두 고개 조물주도 야속하다/ 가노 가노 언제 가노 열두 고개 언제 가노/ [후렴] 시그라기 우는 고개 내 고개를 언제 가노”

이 노래를 보면 흥부장이나 울진장에서 미역·소금·어물을 지고 십이령을 넘었으며, 춘양장을 비롯한 영 너머에서는 대마·담배·콩 등을 지고 흥부장이나 울진장으로 왔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장시가 개설되면서 거래되었던 주요 품목이 지역 특산물보다는 곡물·면포·마포가 중심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울진군 북면 해안 지방에서 생산된 미역과 어물을 십이령을 거쳐 경상도 내륙 지방으로 거래하였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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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울진 봉화 지역의 장시와 특산물(평해 지역 제외)

[십이령을 넘나든 선질꾼]

십이령을 넘나들며 울진과 봉화 지역의 장시를 장악하였던 보부상이 일제강점기에 들면서 퇴조하여 그 역할을 대신한 대표적인 행상단이 선질꾼이다. 이들을 부르는 이름은 매우 다양한데, 일반적으로 선질꾼·등금쟁이·바지게꾼이라 부른다. 이들을 부르는 명칭은 원래 선질꾼이었으나, 어느 시기에 바지게를 지고 다닌다고 하여 바지게꾼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금강송면 소광리북면 주인1리 등에서 사용하는 바지게꾼이라는 명칭은 후대 명칭이고, 선질꾼이라는 명칭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고 인식되고 있다. 바지게꾼이라 부르는 배경으로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행상꾼들이 바지게를 지고 다닌다고 하여 바지게꾼이라고 부른다는 것이고, 둘째는 원래는 선질꾼인데 바지게놀이를 만들면서 바지게꾼이라는 이름이 더 널리 퍼졌다는 것이다.

선질꾼의 또 다른 이름이 등금쟁이이다. 울진군 금강송면에서는 선질꾼이 지나가면 마을 아이들이 ‘등금쟁이 간다’, ‘날아라 등금쟁이 날아라’, ‘날아간다 날아간다 등금쟁이 날아간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들을 등금쟁이라고 부르는 이유로는 세 가지가 전해진다. 첫째는 등에 지고 다니며 물건을 판다고 하여 등금쟁이라 하였다는 것, 둘째는 등짐을 지고 다닌다고 하여 등금쟁이라 하였다는 것, 셋째는 등금쟁이들은 가지가 없는 쪽지게를 지고 다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다양하게 불리는 선질꾼은 강원도에서도 발견된다. 강원도 인제와 양양 등지에서 발견되는 선질꾼은 보부상의 부상과 마찬가지로 등짐장수이다. 보부상은 전국 단위의 조직체이고, 선질꾼은 지역 단위의 소집단으로 구분하는 견해도 있다.

지게꾼은 쪼그리고 앉아서 지게 짐을 지고, 쉴 때도 앉아서 쉬는 것이 보통이다. 선질꾼은 서서 지게 짐을 지고(負), 대개 서서 쉬기 때문에 선질꾼[立負軍] 또는 선질[立負]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선질꾼의 지게와 작대기는 일반 지게보다 길고 작대기 끝에 송곳 같은 쇠붙이를 박아 놓았다. 지게 받치기도 수월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적으로부터 보호용 무기로도 쓸 수 있었다. 강원도 선질꾼의 경우 인제-고성·양양, 정선-삼척·강릉, 대화-강릉 간의 선질꾼들이 유명하다.

[선질꾼의 조직과 장사 규칙]

1. 선질꾼의 조직

선질꾼들은 일행끼리 패를 지어 다녔는데, 많게는 40·50 ~ 1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때 형편이 비슷하고 마음 맞는 사람끼리 한 패가 되었으며, 10~15명 정도가 한 패가 되어 다니기도 하였다. 특히 중간에 도적 등을 만날 것을 두려워하여 대부분 혼자는 안 다녔다고 한다. 이렇게 떼를 지어 다녀 산적도 못 건드렸는데, 이들에게 위해를 가하면 떼를 지어 대응을 하였다고 한다.

선질꾼들은 동고동락하며 서로 친하고 매우 다정하게 지냈으나, 불미스러운 행동[불순한 남녀 관계, 주막집 주모에게 치근대는 등의 행위]에는 여러 명이 해당자를 멍석말이하여 징치하고, 다음날 아침에는 같이 장사하러 떠났다고 한다. 선질꾼 중에서 힘쓰고 말 잘하는 우두머리가 있었는데, 우두머리 중심으로 나름의 규율을 갖추었다. 선질꾼들은 우두머리를 잘 모셨는데, 주막에서는 목침을 갖다 주고 제일 윗자리에 모셨다고 한다. 그러나 우두머리가 없는 선질꾼 무리도 있었다.

2. 선질꾼의 장사법과 규칙

선질꾼들은 장사 계획을 미리 작성하여 장사하였다. 이동 경로·숙박지·들릴 장을 미리 협의하여 결정하고, 장날에 맞춰 각종 물건을 구입한 후 모여서 이동하였다. 매 장날마다 다닌 것은 아니고 형편에 맞게 장날을 정해 다녔다. 이들의 판매 방법은 소매와 도매를 겸하였으나, 보통 물건을 다른 지역으로부터 가져와서 상인들에게 도매로 넘기는 경우가 많았다.

선진꾼들의 장사를 ‘안팎 내외장사’라고도 한다. 흥부장에서 놀·박바가지·해산물을 구입하여 내륙에서 무명·모시·삼베를 구입하는 형태로 상호 이동하며 물건을 판매하여 각각의 이윤을 획득하기에 안팎 내외장사라 한 것이었다. 선질꾼들은 날씨와 가격에 민감하게 반응하였고, 구매한 물건의 양이 많으면 태게를 고용하여 물건을 운반하였다.

[십이령을 넘나들며 선질꾼들이 들린 주요 시장]

울진 흥부와 주변 지역에서 생산된 물건으로 미역·각종 어물·소금·고지 바가지 등이 있었으며, 경상북도 내륙 지방에서 생산된 물건은 주로 쌀·보리·대추·담배·옷감 등이다. 이와 같은 물목 거래를 중심으로 선질꾼들이 주로 들린 시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봉화 춘양장

봉화 지역에는 소천장·현동장·봉화장·춘양장[내성장]이 있었다. 선질꾼들은 내륙에서 춘양장이 가장 컸다고 인식하였으며, 영주까지 진출하지는 않았다. 춘양장에서 구입한 물목은 콩·쌀·각종 잡곡·메밀·팥 등이었으며, 이것을 부구시장에서 판매하였고, 부구에서는 어물·미역·김·파래·소금 등을 구입하여 춘양장에서 판매하였다.

흥부-두천-샛재-춘양장의 연결은 3일이 걸렸으며, 소규모 상단은 춘양장까지 안 가고 현동장으로 가서 물건을 팔고 필요한 것을 구매하였다고 한다. 당시 춘양장은 내광비·외광비에서 60리로 거리가 멀어 대부분 가지 않았다고도 한다. 금강송면 내광비·외광비에서는 현동장으로 제수를 구입하거나 생필품을 구입하러 다녔다고 하는데, 30리 정도 거리였다고 한다. 또한 부유한 법정에서는 주로 물물교환으로 물건을 판매·구입하였는데, 법정장에서는 콩·팥·쌀·깨 등을 구매할 수 있었다고 한다.

2. 울진장

두천리에서 울진 사이는 하루 거리였다. 말래에서 자고 새벽 6시 경에 출발하면 울진에 10~11시 사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두천리에 있는 주막에서는 울진장에 가서 장을 보아 왔다. 흥부장이 비록 울진장보다 컸지만 멀고 비싸서 울진장으로 장을 보러 다녔다고 한다. 울진군 금강송면에서는 곡식을 지고 울진장을 보러 왔다.

3. 울진 흥부장

부구에서 원자력발전소로 넘어가는 다리 아래가 흥부장이 섰던 곳이다. 울진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장이어서 마을이 꽉 찰 정도였고, 장에서 별신도 하였다고 한다. 호산 사람들도 흥부장을 보러 오기도 하였는데, 호산 상인들이 흥부장을 다니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흥부장은 우시장·어물전 등이 유명하였다.

흥부장은 원자력발전소로 가는 다리 아래에 있었으나 해방 후에는 면사무소 앞으로 이전하였고, 1980~1890년 사이에 현재 장터로 이전하였다. 흥부장이 면사무소 앞으로 이전한 후에는 4일 동안 ‘시장별신’을 하였다. 흥부장에는 각종 해산물이 풍부하게 거래되었으나, 내륙에서 생산되는 잡곡이나 곡물류가 많은 것은 아니었다. 내륙에서 어물을 팔고 내륙 지역에서 생산된 곡물류를 많이 가져오지 않아서였다. 흉년이 들면 콩과 팥이 잘 팔렸다. 흥부장은 해방 이후 죽변항이 개설되고, 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되면서 쇠퇴하였다.

[선질꾼과 지게]

지게에는 일반 지게, 바지게[가지가 짧게 있는 것, 가지 없는 것], 오르대 지게, 쪽지게[바지게]가 있다. 오르대 지게는 바지게와 비슷하나 지게 위와 지게 뼈대도 짧고, 가지가 있는 지게이다. 즉, 지게의 위와 아래가 짧은 지게인데, 주로 나무·콩·곡식 등을 운반하는 데 사용하였다고 한다. 특히 벌채한 나무를 지고 다니는 데 많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겨울에 돈벌이가 없으면, 벌채한 나무를 각목 등으로 만들어 놓으면 이를 져다가 장터나 목상이 원하는 곳으로 이동시키는 데 많이 사용하였다고 한다. 산에서 제재한 나무를 나르는 일꾼을 오르대꾼이라 하는데, 이들은 밥을 싸가지고 나무를 지고 다녔으며, 목상(木商)이 흥부 등에서 오르대꾼이 지고 오는 나무의 양을 재어 임금을 지불하였다고 한다. 보통 40~50세를 지고 다녔다고 한다.

쪽지게는 지게 틀의 하나이다. 원래 바지게의 명칭이 쪽지게라고 하는 제보자도 있다. 바지게는 짐을 얹는 가지가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구분되는데, 가지가 있어도 일반 지게와는 달리 가지 길이가 짧다. 대부분의 바지게는 가지가 없이 편평하여 여기에 짐을 노끈으로 묶은 후 지고 다녔다고 한다. 다닐 때는 바지게 아래에 작은 솥단지와 소금·짚신을 매달고 다녔다고 한다.

바지게는 산에서 긴 작대기 2개와 몇 개의 가지를 구하여 끈으로 엮어서 쉽게 만들었는데, 짐을 안 질 때는 부담 없이 버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바를 달아서 당긴다고 바지게라고도 하며, 일반 지게와는 달리 바지게의 등판에는 나무판자를 대어 만든다. 이와 같이 만든 바지게는 장사용으로만 사용하였다. 일반 지게에 비해 바지게는 전체 길이가 길었다. 여기에 미역이나 어물을 가져갈 때는 짚으로 싸서 묶는다. 참고로 태게를 지는 사람은 일반 지게를 사용하여 짐을 나른다.

[선질꾼과 주막]

십이령상에 있는 주요 주막은 샘수골·시치재·말내·쟁패·샛재·저진터 등에 있었다. 이들 주막은 운영 형태에 따라 술만 파는 주막과 술을 팔면서 봉놋방을 갖춘 주막으로 구분할 수 있다. 주막집에서 자는 방을 봉놋방이라 하였으며, 방 내부에는 몽치미[몽침]라 부르는 목침(木枕)만 있고 이부자리는 없었다. 겨울에는 군불을 많이 지펴 주어 전혀 춥지 않았다고 한다.

주막에서 돈을 차고 자면 도둑을 맞을 수 있기 때문에 돈을 주막집 주인에게 맡기는 사람도 있었다. 주막의 안주인이나 술을 파는 주모를 갈보라고 하였는데, 갈보는 요즘의 마담으로 보면 된다. 여기서 얼굴이 통통하면 호박 갈보라 하였다고 한다. 선질꾼들과 마을 주민들은 친하지 않았으나, 자고 가는 주막집 주인들과는 친하였다.

주요 주막은 시치재 입구 주막, 부구3리 주막, 샘수골 주막, 주인1리 성황당 앞 주막, 상당 주막, 두천 주막[말래 주막], 바릿재 주막, 장평 주막[쟁패 주막], 샛재 주막, 소광리 주막, 평전 주막, 큰넓재 주막, 적은넓재 주막, 외광비 주막과 내광비 주막 등이 있었다.

[선질꾼의 신앙, 샛재 성황사의 운영]

지나는 길목에 있는 마을 제당에 들려서 절하고 가는 선질꾼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서낭당 앞에서 절하고 쉬어가고 솥단지를 걸어 밥을 해 먹고 가기도 하였다. 특히 상당 서낭당·하당 서낭당·말래 서낭당·샛재 서낭당에는 들려서 반드시 절을 하고 갔다.

울진 북면 흥부역과 봉화를 연결하는 십이령샛재에는 이들 지역을 오가며 장사를 한 행상단이 모신 성황사가 있다. 고갯마루 바로 아래에 중수(重修)를 하여 반듯하게 유지되고 있는데, 지붕은 기와를 얹은 맞배지붕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제당이다. 정면 입구에는 ‘조령성황사(鳥嶺城隍祠)’라 쓴 편액을 걸었으며, 성황사 내부의 제단 정면에는 ‘조령성황신위(鳥嶺城隍神位)’라 쓴 위패를 모셔 두었다.

샛재 성황사는 대관령 서낭을 받아온 것이라 전해지는데, 이 이야기는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이 연결되는 고갯마루 성황당을 통해 일정한 세력권의 범위를 알려주고 있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는 삼척시 천은사·영은사·신흥사와 동해시 삼화사 등의 창건 설화에 범일국사가 등장하는 것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이 지역 불교 문화가 강릉의 사굴산파와 일정한 관계 속에서 형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또한 동해시 동호동에서 모시는 천지신이 할머니 신이고, 이를 태백산 천제단에서 모시는 천신과 연결하려 한 것은 이 지역이 태백산 천제단 문화권임을 표현한 사례이다.

샛재 성황사는 당 내부에 여자 화상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처음에는 부상(負商)들이,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선질꾼들이 주도하여 제물을 준비하여 제를 지냈으며, 선질꾼들이 사라진 이후에는 빛내마을에서 제당을 관리하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샛재 성황사 내부에는 이들 보부상을 비롯한 행상단이 제당을 중수하고 제사를 지낸 것과 관련한 현판이 다수 걸려 있다.

현재 ‘조령성황사(鳥嶺城隍祠)’라 쓰여진 현판이 제당 전면에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정식 명칭은 ‘조령성황사(鳥嶺城隍祠)’로 볼 수 있다. 성황사 내에 걸려 있는 중수기나 성금방명록 등을 종합해 보면 ‘조령성황당’ 또는 ‘조령성황재사(鳥嶺城隍齋舍)’로도 불렸음을 알 수 있다. 1967년 문화재관리국에서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그 명칭이 ‘조치성황당’으로도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제당의 명칭을 통하여 당시 보부상이나 이후 선질꾼들의 신앙 처소로서의 기능, 그리고 세상을 뜬 보부상과 선질꾼들을 위한 재사(齋舍) 기능을 함께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원홍주등육군상무우사 회원들은 매년 한식날에 홍도원에서 치루어지는 제의에 참여하여 세상을 뜬 보부상들을 기리는데, 이와 같은 사례는 여러 지역에서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 사례들은 별도의 재사나 개인 묘소를 찾아 선대 보부상을 기리는데 비해, 십이령을 왕래한 보부상을 비롯한 행상들을 위한 제사를 성황사에서 지냈다는 것은 다른 지역과 구분되는 사례이다.

제당은 기와를 얻은 맞배지붕이고, 홑처마에 정면 1칸 측면 1칸의 규모이다. 제당 입구 정면 위에 ‘조령성황사’라 쓰여진 편액을 걸었고, 제당 내부에는 정면과 좌우에 제단이 있다. 제당 내 정면에는 ‘조령성황신위’라고 묵서한 나무 위패가 있다. 제당 명칭과 위패로 보아 성황신을 모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두대간의 고갯마루에 있는 제당 명칭이 ‘○○산령각’이고, 모시는 신위 또한 산신 계통이 많다는 점과 비교하였을 때 나름의 특징으로 볼 수도 있다. 행상단이 이곳을 지날 당시 제당 아래에 주막이 있었고, 소규모의 마을과 전답이 있었다는 점으로 보아 마을 수호신의 역할과 함께 행상단을 위한 신앙의 처소로서의 기능을 함께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내부 벽에는 각종 중수기가 걸려 있다.

당의 위치는 샛재 고갯마루에 위치하는데, 보부상들이 다니면서 위하였던 봉화의 고치령·태백의 건의령·임계의 삽당령 등 대부분의 제당들이 고갯마루에 위치하고 있다. 1967년 조사 자료에 의하면 제단 위에 마구할매의 화상이 있다고 하였으나, 지금은 없다. 샛재 성황사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당신도가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1868년에 만들어진 「조령성황사 중수기」에 따르면 화공 황순기가 제당을 중수하면서 당신도(堂神圖)를 그려 봉안하였고, 광서이십년갑오(光緖二十年甲午)(1894) 중수기에 따르면 화공 이치윤이 성황당 당신도를 다시 그려 봉안하였다고 하였다. 1962년에 조령 성황사 영정을 다시 봉안하였는데, 이를 그린 화사는 이택룡이다. 1967년 조사 자료에 기록된 마구할매의 화상은 이 영정을 이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목은 제당 동쪽에 높이 20m의 들미나무가 있으며, 제당 둘레에는 파손된 기와와 돌로 나지막한 돌담을 쌓았다. 제당에서 찬물내기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아래에 보부상이나 선질꾼들이 지나며 돌을 던져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돌무지가 남아 있다. 인근 안일왕 산성과 관련하여 아밀왕이 성을 쌓기 위해 돌을 나르던 곳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와 함께 제당 주변에 1842년에 세운 ‘이광전영세불망비(李光筌永世不忘碑)’가 세워져 있다. 샛재 성황사와 함께 이광전 영세불망비는 샛재가 주요 교통로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제사는 1년 중 봄과 가을에 지냈으며, 연장자를 제관으로 선정하였으며, 제비(祭費)는 위답(位畓)에서 부담하였다고 한다. 준비한 제수는 술·메·백설기·소고기·과실이었으며, 고사를 지낸 후 별신굿을 하였다고 한다. 두천리 주민들에 의하면 샛재 서낭당에서 3년에 1번 정도 10월경에 좋은 날을 받아 굿을 하였는데, 소요되는 경비는 위답을 경작하는 사람에게 소작료를 받아서 모으고, 찬조도 받아서 하였는데, 하루 굿을 하였고, 무당 3~4명이 와서 진행하였다고 한다. 굿을 하면 인근에 있는 빛내·장평·홈교·소광2리·찬물내기·소광1리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굿을 보러 왔으며, 선질꾼들은 여유 시간이 있으면 보고 갔고 일부는 시주를 하였다고 한다.

선질꾼들이 더 이상 십이령을 다니지 않으면서 샛재 성황사는 인근 마을인 소광1리와 소광2리, 소광3리가 함께 운영하였고, 이때 장평과 찬물내기에 거주하는 주민들도 참여하였다. 30여 년 전에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워 소광3리 빛내마을에 넘겨주었다. 원래 빛내마을 서낭당이 있었으나, 샛재 서낭당을 큰서낭으로 모셨는데, 지금은 빛내 서낭당은 없고 샛재 성황사 운영도 마을에서 더 이상 관여하지 않는다.

샛재 서낭당은 대관령 서낭을 받아온 것이라 전해지는데, 선질꾼들이 이 서낭당 앞을 지나다니던 시절에는 고기 한 마리를 수지로 주며 마을 사람들에게 제사를 지낼 때 올려 달라고 부탁하는 경우도 있었다. 주인1리, 주인2리 등 선질꾼이 지나는 길목에 있는 마을에는 선질꾼들이 지나며 마을 서낭고사를 지낼 때 장사가 잘 되고, 건강을 기원하는 소지를 올려 달라고 부탁하면서 제비를 조금 내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새색시가 시집을 가면서 샛재 성황사 앞을 지나며 빨간 천을 당에 달아주고 오는데, 이는 새색시를 따르는 귀신이 더 이상 따라오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로 행한 것이라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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