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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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에 있는 무동력 소형 어선. 가이선 어로는 주로 혼자서 하는데, 한 손으로 작은 노를 저으며 수경을 통해 바다 속을 들여다보고 다른 한 손으로 문어·해삼·전복 등을 잡는다. 울진군 죽변면 죽변4리는 6·25전쟁 직후에 70여 명의 북한 출신 피난민들이 터를 잡아 일구었기에 이른바 ‘아바이마을’로 불린다. 아바이마을에 정착한 이들은 함경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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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장소에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제주도 잠녀와 함경도 아바이 모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속성들을 이주 지역에 연장시킬 수 있는 여력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살아갈 터전을 마련하고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앞으로 먹고 살길이었다. 이 과정에서 사실 함경도와 제주도에서 지속한 민속학적 의례들을 챙길 정신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가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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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 흥원군 삼호면 신성리에서 태어난 심정섭은 1950년 12월 22일날 북한에서 이곳으로 내려왔다. 그의 나이 30살이었다. 함경도의 마을은 어릴 때부터 거주했던 고향이었다. 마을에는 부모님과 형님, 사촌 등 형제들이 살았으며, 그의 어린 자식들과 처가 살고 있었다. ‘내려갔다가 금방 오꾸마’라는 말을 남기며 추운 겨울날 그는 배에 몸을 실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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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아바이들은 월우회를 조직하였다. 홍원군 16명, 북청군 8명 총 24명의 회원으로 출발하였다. 그들이 모임을 조직한 것은 죽변에서 자리 잡기 위한 첫 발걸음이었다. 1951년 남으로 내려와 죽변에 터를 잡았을 당시에도 돌아갈 것을 기정사실로 했기 때문에 모임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언제나 돌아갈 사람들로 생각하여 어떤 새로운 것을 사지도 구입하지도 않은 그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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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5년 신라가 멸망하기 이전 시기의 경상북도 울진군의 역사. 울진 지역은 진한 소국의 하나인 우중국이 있다가 신라에 병합된 뒤, 한 때 고구려와 신라의 충돌지역이 되기도 했으나, 결국 신라의 영역으로서 국가제사인 소사가 설치된 중요한 곳이었다. 진한은 3세기 중엽경까지는 12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소국연맹체였으며, 진한 12국 가운데 하나인 우중국(優中國)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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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함경남도 호원군 삼호면 사람들은 한 배에 동네사람 82명이 타고 피난을 떠났다. 죽변을 떠나서 포항에 도착하지만 해병들의 저지로 정착하지 못하고 구룡포에서 한 달여를 보내고 다시 죽변으로 옮겼다. 당시 70여명의 함경도 사람들은 죽변4리 등대 아래에 정착하였고, 이곳에 하꼬방이라 하는 쪽방을 짓고 처음 그들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제주도 잠녀들의 판자촌이 늘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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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민 70여명 중 60여명은 바다에서 활동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처음 죽변에 왔을 때 어선의 규모와 함께 수산업의 규모를 보고 혀를 찼다고 한다. 특히 선주의 경우 ‘이곳의 수산업은 수산업이 아니지’라는 말을 뱉을 정도로 특히 어선의 규모와 함께 명태의 어획량에 있어서 확연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피난민들이 죽변으로 오기 전 거주한 함경도는 명태잡이로 유명한 곳이다. 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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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 지역에서 예로부터 말이나 소의 목에 얹어 매는 형태로 물건을 운반하는 데 쓰는 도구. 발구는 두 개의 긴 나무를 나란히 얽어서 거름이나 땔감 또는 사람을 나르는 데에 쓰는 운반구로 외발구와 쌍발구 두 종류가 있다. 외발구는 강원도 등지의 산간 지대에서 눈이 많이 쌓였을 때나 산에서 통나무와 섶나무를 나르는 데 쓴다. 쌍발구는 앞채와 뒷채 두 부분으로 이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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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매화면 금매1리에서 곽재우 장군과 임경업 장군에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곽재우 장군이 임진왜란을 끝내고 소실의 고향에 머물면서 단순히 휴양한 것이 아니라 왜적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2001년 울진군지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 『울진군지』에 수록되어 있다.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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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에 거주하고 배를 모는 생업을 하는 이들에게 뱃고사는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중요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 내용과 절차에 있어서 차이는 있지만 출어를 시작하기 전 택일을 하여 뱃고사를 올리고 거친 바다와 바람에 자신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바람은 어디서나 유사하게 나타난다. 함경도의 아바이들과 죽변 선주민들이 공히 뱃고사를 올린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다만 그들의 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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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 홍원군 삼오면 삼성리가 고향인 황종덕은 전쟁이 터지면서 서른살에 죽변으로 온 그는 부산에서도 거제도에서도 살다가 서른네살에 죽변에 정착하였다. 북한에서 결혼하여 다섯살된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얼마 안 있어 군대를 갔다. 나이가 많아서 군대에 면제가 될 줄 알았는데 군대에 가라는 명령이 떨어져서 당시 2기생으로 일본인의 손에 이끌려 군대에 갔다. 함경북도 회령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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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을 지나가는 통일신라시대 동해안 교통로. 신라는 삼국통일 후 지방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교통로를 정비하였다. 『삼국사기』 권37 지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조(三國有名未詳地分條)에는 경주 왕경을 중심으로 한 북해통(北海通)·염지통(鹽池通)·동해통(東海通)·해남통(海南通)·북요통(北傜通)이라는 5통의 교통로가 열거되어 있다. 5통은 왕도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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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일본인 이주촌이 생긴 죽변은 울진군의 다른 지역에 비해서 각종 공공시설이 일찍 들어섰다. 항만시설은 물론이며 전기, 상하수도 등과 함께 어업에 관련된 현대적 장비들이 등장하였다. 일본 시마네현 어민이 울진으로 집단적으로 이주하는 1920년대에는 1880년대부터 일본에 도입된 서구의 선박과 새 기술을 도입한 현대화된 어선들이 대거 유입되었으며, 죽변에는 당시 원주민들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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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 지역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역과 원. 서울에 있는 중앙관서에서 지방 시찰 또는 지방에서 중앙과의 행정 연락을 위한 교통 통신과 그 밖에 기찰사무(譏察事務)를 관장하는 지방분장소에는 역(驛)이 있었다. 이러한 역원제도는 487년(신라 소지왕 9)에 이미 설치되어 있었으며, 고려 초 1079년(성종 2) 6월 역의 대소에 따라 역전(驛田)을 지급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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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에서 온 선주들은 그곳에서 지낸 용제를 기억한다. 용제는 매년 수조망이 시작되면 선주들이 모여서 날을 받고 ‘제주집’을 선정한다. 수조망의 숫자만큼 추렴하여 용제를 모시는데, 용제 전날 선주들은 풍어기를 들고 나와서 제장을 꽂아 둔다. 하루 전날이 되면 밤을 새워가며 소를 잡는데, 이때 제사는 역원들이 맡는다. 용제일 전날 ‘용제터’에 가서 현장에나 소나 돼지를 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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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전반 서울에서 봉화에 이르는 길이 간선도로로 승격되어 7대로가 형성되면서 울진군 북면에서 봉화를 연결하는 교통로인 십이령 길이 동서를 연결하는 대표 도로가 되었다. 울진의 흥부장·읍내장·봉화의 내성장 등 장시가 열리면서 이들 장시가 십이령 길을 통해 연결되었다. 십이령을 넘나들며 울진과 봉화 지역의 장시를 장악하였던 보부상이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퇴조하자 그 역할을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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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에 있는 조선시대 수군 병영진지. 월송포진은 문헌 사료에 "평해군의 동(북) 7리의 거리에 돌로 만든 수군 진이 있었다. 높이는 6(7)척, 둘레는 628(489)척이다. 만호(萬戶) 1인과 수군 400명 정도가 주둔하였는데, 전선(戰船)은 없고 바다쪽의 왜구를 막기 위함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만호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무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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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에서 이곳으로 육군후생사업의 일환으로 오징어를 팔고 건조하기 위해서 올라왔다. 오징어를 잡아 건조해서 파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떠돌아다니는 그들이 이곳에 와서 오징어를 잡아 건조하기 위해서 육군들과 함께 올라왔다. 또 떠나야 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배에서 내리지 않고 그냥 있었다. 그런데 그 해 오징어가 많이 잡히지 않고 배에서 할 일이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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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이후 죽변은 많은 변화를 경험한다. 특히 인구변동은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심하게 나타난다. 공동체 영역에서 마을을 이루며 거주하는 이들은 약간의 인구 이동이 일어나지만 기본적으로 3대 이상이 거주하거나 또는 장기적으로 거주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옆집의 부엌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이웃의 근황에 대해서 먼 친척보다도 더 자세하게 알고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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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 이주민들의 직업과 계층을 살펴보면 선주가 3명, 가이선 어로자가 15명, 나머지는 선원이었고 10여호는 장사를 하는 사람이었다. 약 70여명의 이주민 중에서 가이선 어로자는 15명으로 그들의 가이선에 대해서 죽변 사람들은 함경도 사람들은 수산기술이 좋다는 평가를 한다. 가이선은 뎃마라고 부르는 작은 어선으로 ‘채경선’ 또는 ‘수경선’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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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처음부터 배를 타지는 않았다. 어려서는 만주사변이 일어나서 시장에 가서 천장사를 하였다. 북한에서도 배운 것이 없고, 가진 것도 많이 없었고 일본인들에 의해 마땅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을 시기 만주를 오가며 천장사를 행하였다. 그렇게 그럭저럭 장사가 되는 듯 했는데 전쟁이 나면서 중단되었다. 열일곱에 만주를 오고가며 천장사를 소매와 도매를 했던 심정섭은 북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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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 지역의 산간마을에서 실내 조명이나 난방을 위해 사용하던 시설. 곳쿨, 고콜, 코구리라고도 불리는 콧굴은 울진 지역의 산간마을뿐만 아니라 강원도와 함경도 지역의 산간마을에서 실내 등화구 겸 벽난로로 사용하던 시설이었다. 또한 감자나 고구마를 구워 먹기도 하고, 식사 때는 국이나 찌개를 데워 먹는 등의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실내 등화구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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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변4리 사람들은 북으로는 함경도, 남쪽으로 제주도 그리고 울진의 각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다양하게 산다고 하여 유엔총회라 부른다. 남쪽 끝 제주도에서 온 사람과 북쪽에서 온 사람들이 중간 정착지 죽변에서 만나 함께 살아갈 것을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아마 이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조차도 자신이 이곳에서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과 함께 하나의 마을을 이루면서 살아갈 것을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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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 지역에 있었던 조선시대 향촌 자치 규약. 조선시대 군읍 또는 향촌 사회에는 그 구성원이나 단체의 조직 체계와 운영상 갖가지 내부 규약과 각종 명부인 좌목(座目)들이 있었다. 그러한 규약에는 향규(鄕規)를 비롯하여 향약(鄕約)·동약(洞約)·계약(契約) 등이 있으며, 좌목에는 향안(鄕案)과 동안(洞案) 및 각종 계안(契案) 등이 있었다. 향규는 유향소의 조직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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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경상북도 울진 출신의 문신.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회원(會元), 호는 해월(海月)·매월(梅月)·만귀(晩歸). 고려 충렬왕 때 첨의평리문하시중을 역임한 황서(黃瑞)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황세충(黃世忠)이고 할아버지는 성주목사 황우(黃瑀)이다. 장예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 황응징(黃應澄)과 충무위사직(忠武衛司直) 정창국(鄭昌國)의 딸 숙부인(淑夫人) 영덕정씨(盈德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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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진군 후포면 후포리에 있는 신석기시대 집단 무덤. 후포리 선사유적은 후포3리의 바다쪽으로 돌출한 해안단구 상면인 해발 45m의 등기산[속칭 등대산] 정상부에 위치한다. 정상부의 동쪽과 남쪽은 해안 절벽이다. 이곳에서 사방을 바라보면 동북쪽과 동남쪽에는 동해가 펼쳐져 있고, 뒤쪽에는 후포항과 시가지가 내려다보인다. 이러한 입지는 바다와 관계가 깊은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