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13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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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謙齋正善-金剛山-鐵原-金化-風光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영규 |
[정의]
강원도 철원 지역에서 이루어진 겸재 정선의 그림 여행 따라가기.
[개설]
조선 시대 선비들은 금강산에 가서 그 아름다운 풍광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을 최고의 풍류로 여겼다. 일제 강점기에는 전국 각지에서 금강산 탐방객들이 몰려들어 경원선과 금강산 전기철도를 이용하여 금강산에 접근하였다. 조선 시대든 일제 강점기든 지금의 서울에서 금강산에 가려면 우선 강원도 철원 지역을 거쳐 가야 하였으니, 서울-의정부-포천-철원-김화-금성-단발령-내금강이 그 경로이다.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도 이 루트를 통하여 자주 금강산에 갔고 그때마다 철원에 들러 철원의 명승지를 그림으로 남겼다. 현재는 이러한 그림 여행이 철원 여행의 중요한 문화적 콘텐츠가 되었다.
[철원을 그린 진경산수화의 대가 정선]
조선의 3대 화가 하면 겸재 정선,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1758~?] 등을 꼽는다. 이들 중 정선은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완성한 화가이며 대표작으로는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와 「금강전도(金剛全圖)」가 있다.
진경산수화는 중국풍 그림을 답습하던 기존의 관념산수에서 벗어나 우리 산천을 직접 있는 그대로 그리며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고유의 화법이며, 줄여서 진경이라고도 한다. 이는 우리 산천의 자연환경이나 명승지를 사실적으로 기록하는 데에 중점을 둔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의 전통을 바탕으로, 작품성과 회화성에 더욱 중점을 둔 우리나라의 새로운 화풍을 창출한 것이다. 종래의 형식화된 창작 태도에서 벗어나 현실을 통하여 옛 뜻과 이상을 찾고자 한 당시 사상적 동향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림의 소재로는 명승 명소, 자연을 벗삼아 전원생활을 즐기던 별장 주위의 경치, 야외에서 모임을 열어 친목을 도모하던 광경 등을 다루었으며, 특히 금강산과 관동 지역, 한양 근교의 경관이 가장 자주 다루어졌다.
정선은 직업으로 그림을 그리던 화원이 아니라 성리학자였다. 정선은 서른여섯 살 되던 해인 1711년(숙종 37) 금강산을 처음 대면하고 『주역(周易)』의 음양 원리에 입각하여 음양의 조화와 대비로 화면을 구성하여 내는 새로운 화풍으로 금강산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표현 기법을 보면, 음인 흙산은 먹으로 그리는 묵법(墨法) 중심의 중국 남방 화법으로 그리고, 양인 바위산은 선으로 그리는 선묘(線描) 중심의 중국 북방 화법을 사용하여, 두 화법을 한 화면에서 이상적으로 통합하였다. 이러한 화법은 흙산과 바위산이 어우러져 있는 우리 산천의 특징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데에 가장 적절한 새로운 기법이었다.
[겸재 정선이 철원을 자주 찾았던 이유]
정선은 진경산수화법을 평생 갈고 닦아 우리 국토의 아름다운 경치를 기회가 닿는 대로 찾아다니며 그림으로 남겼다. 우리나라 제일의 명승지인 금강산을 그리는 데에 일생을 바친 정선은 금강산에 갈 때마다 철원에 들렀고 포천의 화적연과 철원 삼부연(三釜淵), 평강의 정자연, 그리고 김화의 화강백전, 금성의 피금정을 화폭에 담았다. 조선 전기 『태종실록』에 의하면 한양에서 철원 강무장(講武場)까지는 사흘 정도 걸렸다고 전한다. 한양[서울]에서 철원에 다다르려면 예나 지금이나 현재 국도 제43호가 지나는 의정부, 포천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금강산으로 가려면 철원에서 김화, 금성을 거쳐 단발령을 넘어가야 한다. 이 경로로 「관동별곡(關東別曲)」의 저자인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이 지나갔고, 일제 강점기에는 금강산 전기철도가 운행되었다.
정선은 스승인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1653~1722]이 철원의 용화동에 머물고 있었고, 평생지기인 이병연(李秉淵)[1671~1751]이 김화현감으로 있어서 이곳을 자주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병연은 조선 후기 시인으로서, 특히 영조 때 최고 시인으로 화가 정선과 더없이 친하였으며 문인 화가 조영석(趙榮祏), 영의정을 지낸 금석학의 대가 유척기(兪拓基), 형조판서를 지낸 시인 조정만(趙正萬) 등과 어울려 시와 그림을 논하며 각별히 지냈다.
[스승님을 뵈러 가다 매료된 삼부연 폭포]
정선이 두 번째 들른 곳이 삼부연이다. 삼부연은 지금의 철원군청이 있는 갈말읍 신철원리에서 용화동으로 가는 길가에 있는 20m 높이의 커다란 폭포이다. 화적연에서 삼부연까지는 자동차로 채 20분이 안 걸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이다. 삼부연이라는 이름은 폭포 물줄기가 세 번 꺾이면서 떨어지는 모양이 마치 세 개의 가마솥이 걸려 있는 것 같아 붙여졌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삼부연에 네 마리 이무기가 살았는데 그중에서 세 마리만 용이 되었다고 한다. 용이 승천할 때 꼬리를 휘저으며 빠져나가 폭포 양옆 바위 절벽이 매끄럽고 커다랗게 움푹 파이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가 심술을 부리면 철원에 가뭄이 들어, 지역 주민들은 이곳에 단을 설치하고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정선이 이곳을 찾은 가장 큰 이유는 폭포 상류에 있는 용화동에 스승인 김창흡이 거처하였기 때문이다. 김창흡은 당대 명문가 출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아버지 김수항과 역시 영의정을 지낸 형님 김창집이 당쟁으로 모두 사약을 받았다. 그리하여 김창흡은 모든 권세를 뒤로하고 스물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용화동에 은거하며 성리학과 시에 정진하여 당대 최고 문장가로 추앙받았다. 정선이 추구하던 진경산수화는 철원에서 스승 김창흡의 영향으로 더욱 발전하였다. 「삼부연도(三釜淵圖)」는 늘그막의 정선이 호방하고 장쾌한 필법을 거침없이 구사한 걸작이다. 화면 중앙에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 봉우리와 맞은편 암벽을 붓으로 쓸어내려 도끼로 쪼갠 단면처럼 보이게 나타낸 표현법이며, 봉우리 끝이나 수풀을 묘사한 흥건한 먹칠법은 정선 그림 중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대비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창랑정 정자가 있었던 정자연]
정자연(亭子淵)은 남방한계선 바로 밑인 한탄강 최상류에 있다. 삼부연이 있는 철원군청에서 자동차로 30분가량 걸린다. 정자연은 일제 강점기에 행정구역상 평강군에 속하였으나 6·25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철원군으로 편입되었다. 현재는 군 초소를 거쳐야 출입할 수 있는 곳이다. 남한 최북단 한탄강 본류에 있는 정연(亭淵)은 고려 시대부터 철원과 평강 지역에 세거하며 번창하여 온 창원황씨의 농원이 있던 곳이다. 이곳은 조선 광해군 때 강원감사를 지낸 월담(月潭) 황근중(黃謹中)[1560~1633]에 의하여 유명해지게 된다.
황근중은 인조반정으로 관찰사를 그만두고 정계에서 밀려나게 되자 한탄강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현무암 절벽 위에 여덟 칸 규모의 정자를 세우고 창랑정(滄浪亭)이라 이름 지었다. 정자 이름은 중국 초나라 시인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詞)」 가운데 “창랑의 물 맑으면 내 갓끈을 빨 것이요, 창랑의 물 흐리면 내 발 씻으리로다.”라는 곧은 절개를 표현한 문구에서 인용한 것이다. 황근중은 정자 주위의 절경 여덟 곳을 정연8경이라 부르기 시작하였고, 이곳이 금강산 접어드는 길목이라 문인들이 운집하는 명소가 되어 자연스레 ‘정연’ 또는 ‘정자연’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정선이 서른여섯 살 때인 1711년 금강산에 처음 가면서 들렀을 때는 병자호란[1636년]으로 창랑정이 불에 타 버리고 아직 복구되지 않은 상태였던 것 같다. 정선은 김화현감 이병연(李秉淵)과 평강현감을 지낸 김양겸(金養謙) 등 지인들이 있어 이곳을 자주 찾았고 「정자연도(亭子淵圖)」를 여러 점 남겼다. 그림에는 수직 암벽이 일자로 길게 펼쳐져 있고, 반대편으로 늙은 소나무와 잡목 숲에 싸인 초가집 두 채가 울타리로 둘러쳐져 있다. 정선 그림에 비쳐진 정연의 아름다운 강촌 마을은 현재 지뢰밭으로 변하여 있고, 휴전선과 비무장지대가 가로막고 있어 더는 정선을 따라서 금강산으로 갈 수 없다. 정자연 한탄강 위에는 일제 강점기에 건설된 금강산 전기철도 정연철교가 앙상하게 남아 있다. 조선 시대 선비들의 풍류 문화를 상징하는 창랑정과 정자연이 복원된다면 철원의 대표 관광명소로 다시 한 번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다.
[청나라 군사에 맞선 기백이 넘치는 화강백전]
정선은 금강산 가던 길에 「화강백전(花江柏田)」이라는 그림을 남겼다. 화강은 김화의 옛 지명이고 백전은 밀식된 잣나무를 뜻한다. 정선은 이 그림을 통하여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사에 맞선 근왕군들의 충성심을 그림에 담았다. 빽빽하게 하늘로 향해 쭉쭉 뻗은 잣나무는 당시 전투에 임했던 근왕군의 충만한 사기를 의미한다.
병자호란은 1636년(인조14) 12월 8일 청나라가 13만 병력으로 조선을 무력으로 침공한 전쟁이다. 전쟁은 청의 일방적인 제압으로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치욕적인 정축화약(丁丑和約)을 체결하며 종식된 전쟁이다. 개전 초부터 다수의 기병(騎兵)을 보유한 청군의 빠른 진격 속도에 미처 대응하지 못한 조선은 결국 남한산성에 들어가 외부의 구원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강화도의 함락, 주전·주화파의 대립, 장기전으로 인한 군량 부족 등으로 치욕적인 항복을 하게 되었다.
이 같은 국란의 기간 중에 전국 각도에서 모집된 근왕군이 남한산성으로 모여들고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전투들이 벌어졌다. 이 가운데 김화 백전 전투는 병자호란 종반부인 1637년 1월 28일 남한산성을 지원하려고 남쪽으로 진격하던 평안도 근왕군과 이를 차단하려는 청군 사이에 일어난 전투이다. 이 백전은 현재의 충렬사에서 남쪽으로 건너 마주 보이는 낮은 봉우리와 그 능선 일대이다. 평안감사 홍명구(洪命耈)와 평안병사 유림(柳琳)이 지휘한 김화 백전 전투는 용인 광교산 전투와 함께 병자호란에서 승리한 두 곳 중 하나이다. 당시 마흔두 살이었던 홍명구는 왕의 명령을 받고 2,000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곧바로 남한산성으로 향하였다. 청군의 침입을 최전선인 평안도에서 조기에 차단하지 못한 홍명구는 자신의 과오를 만회하려는 듯 2,000명과 평안병사 유림의 군 3,000명을 포함한 5,000명의 근왕군을 이끌고 김화에서 네 차례에 걸쳐 청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여 약 3,000명의 청군 희생자를 내고 승리하였으나, 이 전투에서 홍명구는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DMZ에 묻힌 수태사와 피금정]
정선의 그림 중 「수태사동구(水泰寺洞口)」와 「피금정도(披襟亭圖)」는 철원에 인접한 김화 지역을 그린 그림이다.
수태사(水泰寺)는 강원도 김화군 근북면 건천리에 있는 절이며 김화군 북쪽 약 14㎞ 지점에 있다고 하니 지금은 휴전선 이북이라 갈 수 없는 곳이다. 옛 기록에 의하면 절은 어느 때 세웠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절은 산 아래 평지 위에 있는데 산은 밝고 빼어나며 물은 곱고 크며 깊다고 전한다. 사면의 산봉우리들이 옹기종기 높이 솟아 있어 마치 높은 관을 쓴 대부들이 서로 인사를 올리는 형상이다. 정선은 「수태사동구」에서 산봉우리의 울창한 수풀은 점을 찍듯 그렸고 산 중턱은 그리지 않아 구름에 잠긴 듯이 표현하였다.
피금정(披襟亭)은 강원도 김화군 금성면 남대천 변에 있다. 현재는 휴전선 이북에 있으나 과거에는 한양에서 금강산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거치는 통로였던 남대천 변 큰길가에 자리 잡고 있는 피금정은 그림에서 보듯이 주변에 울창한 숲들이 우거져 있다. 이것은 큰비로 남대천이 범람하여 큰 수해를 입자 당시 지방관이 냇가에 수해 방비 대책으로 방축을 쌓고 잡목을 심었는데, 그렇게 하여 생긴 자연스러운 가로수 숲의 길이가 거의 2㎞ 길이나 되어 금강산 초입의 정취를 북돋고 있다. 정선의 「피금정도」는 상·중·하의 3단 구도를 분명하게 드러내면서 넓은 공간을 한눈에 볼 수 있게 그려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