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10001
영어공식명칭 from Rural Village to Urban Settlement! Convulsion of Gu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구리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손승호

[정의]

서울특별시의 근교 농촌에서 자족 도시로 발전한 경기도 구리시 발달 과정.

[개설]

한적한 농촌 마을이었던 구리는 196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조선 시대부터 한성의 근교 농업 지역으로 기능하였던 구리시는 근래에 들어서도 서울 지역에 채소를 공급하는 근교 농업 도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또한 서울 지역으로부터 이주해 온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택지 개발이 진행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서울 지역에 종속된 위성 도시로서의 성격을 보이다가 최근 들어서는 자족 도시로 발돋움하고 있다.

근교 농촌에서 자족 도시로 성장한 구리시는 도시 중앙을 동서로 횡단하는 교통로가 균형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국도 6호선경의 중앙선 철도가 구리 시가지를 분리시킴으로써 남북 간 도시 공간의 단절 현상이 발생하였다. 구리시 면적의 61.6% 정도에 달하는 개발 제한 구역도 구리시의 도시 확장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구리시가 비약적인 발전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기성 시가지의 과밀화 문제도 구리시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이다. 이러한 제약 조건에도 불구하고, 구리시에서는 교통 체계의 개선 및 도시 공간의 재편을 통해 남북 간의 균형 발전을 도모하고 있으며, 자연 환경 및 역사 문화적 속성과 어우러진 도시로의 발전을 추구하고 있다.

구리시에서는 현재도 도시 개발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기존의 농경지가 새로운 시가지로 탈바꿈하거나 농촌적 성격이 강한 지역이 도시적 주거 공간으로 개조되고 있다. 도시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구리시는 다른 도시와 비교하면 아주 짧은 시간에 도시적 색채가 매우 강력하게 발현되는 도시이다. 그러나 구리시 남쪽에 자리한 아천동토평동 일대를 비롯하여 구리시 북쪽의 갈매동사노동에서는 여전히 농촌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는 지역이 있기도 하고, 중앙에 자리한 교문동을 비롯한 인창동, 수택동 등지는 도시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처럼 구리시는 도시 지역과 농촌 지역이 공존하는 도시이다.

[구리시의 인구 증가와 도시화]

농촌 마을이었던 구리는 1960년대 초반만 해도 인구가 1만 명을 겨우 넘을 정도의 소규모 취락이었고, 도시화의 수준도 매우 미미하였다. 1963년에 1만 명을 넘어선 구리의 인구는 1965년과 1967년을 제외하고 매년 꾸준히 증가하였다. 구리의 인구 증가는 출생과 사망으로 산출되는 자연적 증가보다는 전입과 전출이라는 사회적 증가에 의해서 더 쉽게 설명할 수 있다. 1960년대의 인구 증가율이 연 10%를 상회하였음은 단순히 자연적 증가에 의해 구리의 인구 증가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구리의 인구 증가는 구리의 서쪽에 접해 있는 우리나라의 수도 서울특별시의 성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서울특별시의 도시 기능이 확대되고 시가지의 수평적 팽창이 진행되면서 서울특별시의 주변에 자리한 지역은 고밀도의 주거지역으로 개발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구리시는 서울특별시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는 위성 도시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위성 도시는 행정 구역 상 서울특별시와 별개의 것이지만, 기능적으로는 서울특별시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독립적인 도시로 보기 어렵다. 그 결과 구리의 인구는 1971년에 3만 명을 넘어섰고, 1973년에는 구리읍으로 승격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인구가 2만 명을 넘어서면 읍으로 승격할 자격이 된다는 점에서 구리의 읍 승격은 늦은 감이 없지 않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울특별시에 거주하는 인구의 탈도시화 현상이 시나브로 진행되었다. 서울에 직장은 그대로 두지만, 주거지만 서울 주변의 도시로 이전하면서, 서울 주변에 입지한 도시의 성장을 더욱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구리의 인구는 1976년에 5만 명을 넘어섰고 1981년에 7만 명을 넘어섰다. 그리고 1985년에 8만 명을 돌파하였고 이듬해인 1986년에 9만 명을 넘어서면서 구리시로 승격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시 승격의 최소 인구 조건이 5만 명임을 고려하면, 구리의 시 승격 역시 인구 규모에 비해 다소 늦게 이루어졌다.

1990년대는 서울특별시의 인구가 감소하던 시기이다. 서울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서울 이외의 도시로 주거지를 이전하는 탈도시화 현상이 심화되면서 서울 주변에 자리한 도시의 인구 증가와 도시화가 현저하게 진행되었다. 서울의 인구 감소가 진행되면서 구리시에서는 2007년까지 전입 인구가 전출 인구를 초과하여, 인구의 사회적 증가 현상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2008년 이후로는 전출 인구가 전입 인구를 초과하면서 사회적 감소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전출 인구가 많아졌음에도 인구의 자연적 증가 현상이 지속됨에 따라, 구리시의 인구는 2010년까지 꾸준히 증가하였다. 2011년 이후부터는 전입 인구의 감소와 더불어 구리시의 인구가 감소 추세에 있다. 구리시의 인구 증가는 곧 주거 기능의 강화를 의미한다. 또한 2000년대 후반부터 주춤해진 인구 증가는 2000년대 들어 대규모의 택지 개발 사업이 마무리됨에 따라 구리시로 인구를 끌어들이는 흡인 요소가 감소하였음을 보여 준다.

[조선 시대부터 발달한 근교 농업]

조선 시대에 한강 하류인 한양이 도읍으로 정해지면서, 한성 주변 지역은 왕실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배후지로 발달하였다. 지금의 구리시 지역은 조선 시대에 양주에 속하였으며, 양주는 도성으로부터 50리 이내에 자리한 근교에 포함되었다. 조선 후기 들어 한성부의 인구가 증가하고 이들 인구가 식량과 연료 등을 필요로 함에 따라, 장거리 수송이 불가능한 채소․과일 등은 한성 주변의 근교나 원교에서 조달하였다. 왕숙천한강으로 둘러싸인 현재의 구리시 일대에서는 하천변에서 채소 재배가 성하였으며, 배와 같은 과일이 생산되기도 하였다.

근교 지역은 농업 기능뿐만 아니라 종교 기능 및 방어 기능이 발달하면서 취락이 성장하였다. 현재의 구리시는 한성의 동쪽에 위치한 동교(東郊)에 해당하였으며 조선 태조의 능인 건원릉을 포함하는 동구릉이 조성되었기 때문에 제사는 물론 능묘의 봉공 등에 관련되는 왕의 행차가 잦았던 곳이다. 조선 시대의 양주는 도읍 주변에 자리하여 인구 증가와 함께 도성 방어의 관점에서도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조선 시대 도성 주변의 근교 지역과 원교 지역에는 유명한 토착민들이 많이 분포하였지만, 전쟁과 사회 경제적 혼란을 겪으면서 여러 씨족 집단이 다른 지방으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양으로부터 50리 이내의 반나절 생활권에 속한 양주 지방에서는 한양과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로를 따라 인구가 모여들게 되었다.

양주 지방에 인구가 증가하고 한성과의 연결 관계가 강화됨에 따라, 근교 농업 지역으로서 양주의 중요성은 더욱 증대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왕숙천을 끼고 발달한 구리시는 서울 동북부의 근교 농업 도시로 육성하는 목적하에 시로 승격되었다. 이는 구리시가 서울과 가까울 뿐만 아니라 교통 여건도 양호한데다, 구리시의 61.6% 이상이 개발 제한 구역으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개발 제한 구역으로 지정된 면적이 넓기 때문에 구리시 전체의 도시 개발이 억제되었고, 이는 구리시를 서울 근교의 농업 도시로 육성하는 데 가장 합리적인 이유이기도 하였다. 근교 농업 개발과 함께 서울 동북부의 소비 시장을 대상으로 건립된 것이 구리시 농수산물 도매시장이다.

[토지 이용의 변화와 택지 개발]

도시화의 진행과 더불어 구리시에서는 경지 면적이 지속적으로 감소하였는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논의 면적 감소가 현저하다는 점이다. 경지 면적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구리시에서 생산되는 채소류의 생산량은 1990년대 들어 매우 가파른 증가 추세를 보였다. 구리시에서는 1992년에 근교 농업 육성 계획을 추진하여 430농가에서 124㏊의 농경지에 상추, 쑥갓, 파, 오이, 토마토 등의 시설 채소를 본격화하였다. 근교 농업은 현재까지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과실류에서는 배의 생산량이 압도적으로 많고, 그 밖에 사과와 포도 등이 재배된다. 근래에는 토지 개발이 제한되는 개발 제한 구역에서 이루어지는 시설 재배 농업이 근교 농업의 맥을 이어주고 있다.

서울 거주자들의 탈도시화 현상이 진행됨에 따라, 구리시에서는 1980년 10월에 교문리[교문동]와 수택리[수택동]를 대상으로 구리 제1 지구 토지 구획 정리 사업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1986년 5월에는 총 239만 7000㎡에 해당하는 면적이 택지 개발 예정 지구로 지정되었다. 이를 통해 인창 지구, 교문 지구 등의 택지 개발 사업이 본격화하였다. 한편 1988년부터 1992년 사이에는 전국적인 주택 200만 호 건설 사업의 일환으로, 구리시에서는 주택 1만 호 건설 사업 계획이 수립되었다. 그리고 도로 확장 및 보수, 도로 개설, 주차장 설치, 고속 도로 건설 등의 공사가 198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하였다. 이에 따라 구리시의 토지 이용은 농촌 지역의 비중이 감소하고 도시 지역의 토지 이용이 증가하였고, 농업 지역의 성격이 강하던 구리시는 점진적으로 도시적 성격이 강한 새로운 도시 공간으로 탈바꿈하였다.

[서울의 위성 도시에서 자족 도시로 발전]

구리시가 서울의 근교 농업 도시로 발전하였지만, 단순히 농업 기능이 강한 도시는 아니다. 서울에 직장을 둔 사람들이 그들의 거주 공간을 구리시에 재편함으로써 서울특별시와 구리시는 불가분의 관계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구리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생활권이 서울에 종속되어 있는 사실로도 확인할 수 있다. 구리시에서 출발하여 서울특별시로 진입하는 시내버스의 종점이 대체로 서울의 청량리역과 동서울 버스 터미널, 잠실 등에 집중되어 있다.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구리시에 사는 사람들은 서울의 경동 시장이나 동대문 시장에서 생필품을 구입하는 경우가 지배적이었다.

서울에 접한 구리시는 서울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땅 값, 자연 친화적인 생활 여건, 도로 교통의 발달과 자동차 보유 가구의 증가로 인한 접근성의 향상 등이 맞물리면서 본격적으로 발달하였다. 구리시의 교문 지구와 인창 지구의 개발에 따른 대규모 아파트 단지의 건설은 구리시 이외의 지역에서 전입하는 인구의 흡인 요소로 작용하였다. 1999년 토평지구에 계획된 민영 주택에 대한 청약 접수 결과 일부 평형에서 100대 1을 넘는 높은 경쟁률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구리시의 용도별 토지 이용의 변화를 살펴보면, 도시 지역을 구성하는 토지 이용의 비중이 증가하는 가운데에서도 가장 증가 현상이 두드러진 토지 이용은 주거 용지이다. 상업 용지가 구리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증가하였지만, 그에 비해 주거 지역의 비중 증가가 훨씬 현저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구리시의 도시 성장이 인구 증가에 기인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구리시로 전입한 인구는 서울에서 빠져나온 인구가 가장 많았다. 이는 구리시가 독자적으로 성장한 것이 아니라 서울과의 긴밀한 연계 속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구리시에 전입한 인구의 30% 가량은 서울에 거주하던 사람들이었다. 경기도 전체의 전입 인구 가운데 서울에서 이주해 온 사람의 비율이 20%를 넘지 않았음으로 고려하면, 서울 거주자의 구리시 전입 비율은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서울에 종속된 주거지로서 구리시가 성장함에 따라 구리시와 서울 간의 교통 여건도 개선되었다. 일찍부터 구리시와 서울 중랑구를 잇던 국도 6호선이 확충되었고 망우리 고개의 정비 사업이 실시되었다. 또한 아차산 남쪽에서 구리시와 서울 광진구를 연결하는 국도 43호선강변 북로가 개설되면서 구리시와 구리시 주변 지역 간의 상호 작용도 더욱 활발해졌다. 여기에 기존 중앙선 철도의 복선 전철화 및 고속화 도로의 개통도 구리시의 도시 여건을 개선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위성 도시는 대도시에 종속되어 있다는 의미이므로, 자생적인 발전에는 한계를 가지기 마련이다. 구리시 역시 서울특별시의 위성 도시적 성격이 강하였지만, 구리시에서는 계획 인구를 적절히 수용할 수 있도록 주거 공간, 생산 공간. 친환경 공간, 위락 공간을 확보하고 도시 경제력의 신장을 도모하였다. 또한 서울의 배후 도시로 발전하면서 중산층 이상의 입주민을 수용하는 침상 도시(bed town)로 구리시를 육성하는 동시에 구리시 자체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자족 기능을 확보할 수 있도록 도시 공간 및 기능을 재편하였다. 이미 개발이 진행된 기성 시가지를 재정비하고, 도시의 수평적 확장에 따른 신시가지를 개발함으로써 구리 시내에서 인구를 적절히 재배치하는 계획도 수립하였다. 이를 위해 구리시에서는 자연환경을 최대한 보존하고 쾌적한 도시 환경을 창출할 필요가 있다. 주민 생활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교육 문화․사회복지 시설의 현대화를 도모하고 시설을 충분히 확보함으로써, 서울에 대한 종속도를 낮추는 동시에 살기 좋은 자족 도시로 변모하고 있다.

2013년 기준으로 구리시에는 6만 3908가구가 살고 있으며 주택의 총수는 6만 140호에 달하여, 주택 보급률은 94.1%를 기록하였다. 주택 보급률은 1995년에 66.0%에 불과하였던 것이 1996년에 82.4%로 상승한 후 2010년에 97.0%로 가장 높았지만 2011년 이후 낮아지고 있다. 주택 유형은 아파트가 지배적이다. 아파트의 비중은 1995년에 40.7%에 불과하였지만, 2013년에는 73.1%로 증가하였다. 단독 주택의 비중은 1995년에 29.1%이었던 것이 2013년에는 30.3%로 증가하였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 이는 택지 개발을 통한 아파트의 대량 공급이 구리시의 인구를 증가시키는 요인이었음을 보여준다.

[서울 의존도가 낮아진 구리시의 사람들]

일일 단위로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통행 패턴을 이용하여 생활권을 살펴볼 수 있다. 구리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통행권은 서울 동북 지역과 경기 동부 지역이 포함되는 범위에 걸쳐 있다. 구리 시민들의 주요 생활권에는 구리시와 경계를 맞대고 있는 서울특별시의 중랑구, 광진구, 노원구 등지가 포함되며 경기 동부에서는 남양주시, 양주시, 동두천시, 의정부시, 하남시 등이 포함된다.

구리는 여전히 서울의 배후 지역에 해당하는 도시이다. 그러나 구리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생활 패턴을 보면, 점차 서울 의존도가 낮아지고 있다. 즉 구리시의 자족 기능이 다소 부족하였던 1990년대 초반의 이동 패턴을 2010년대와 비교해 보면, 2010년 들어 서울로 유출되는 통행의 빈도가 감소하였다. 1990년에는 구리시에서 발생하는 통행량의 40.7%가 서울로 향하였지만 2010년에는 전체 통행량의 34.2%만이 서울을 목적지로 하였다. 이에 반해 구리 시내에서 종결되는 통행량의 비율은 1990년의 47.1%에서 2010년에는 50.3%로 상승하였다. 남양주시로 유출되는 통행량의 비율도 소폭 감소하였다. 서울에 있는 자치구별 통행의 비중은 강남구가 가장 크고 그 뒤를 이어 구리시와 인접한 중랑구, 광진구, 송파구, 동대문구 등지이다. 구리시에서 구리 이외의 지역으로 유출되는 통행량의 비중이 감소하였음은 구리 시민의 생활에서 주변 지역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졌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을 중심으로 형성된 수도권에서는 서울로의 통행 집중도가 여전히 높은 수준을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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