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20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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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Education for 100 Years in Guri, Hidden Story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황금희 |
[정의]
경기도 구리시 교육 1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인창 초등학교와 서울 삼육 고등학교 이야기.
[개설]
경기도 구리시 교육 10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학교인 인창 초등학교, 서울 삼육 고등학교를 통해 일제 강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변천 상황을 중심으로 서술하여 구리 교육을 파악해 보고자 한다.
[100년 교육, 씨앗을 뿌리다]
1.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의 포화를 오롯이 겪어 낸 '인창 초등학교'
초라한 오막살이 교실 몇 칸이 전부였다. 구리 지역의 유일한 교육 기관이었던 인창 초등학교 이야기이다. 단 하나뿐이던 초등학교[당시 보통 학교]는 풍전등화 같던 일제 강점기를 버티고, 6·25 전쟁의 참화로 잿더미가 되는 아픔을 고스란히 겪어 내고 2016년 현재 100년을 바라보는 경기도 지역의 손꼽히는 교육의 요람이 되었다.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인창 초등학교는 1921년 5월 17일 기존의 사립 망우 학교를 편입하고, 4년제 4학급 형태를 갖춰 '인창 공립 보통 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하였다. 개교 당시에는 구리 지역 외에도 현재 서울특별시 중랑구 묵동·상봉동·망우동까지 포괄하는 넓은 지역에서 학생들이 통학했다. 오막살이 교실 몇 칸이 전부였지만 구리 지역에서 단 하나뿐인 교육 기관이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인 1937년에는 '인창 심상 소학교'로 개칭되었다. 1945년 8·15 해방이 될 때까지 명맥을 유지했으며, 1947년 10월 학급 수는 11개로 늘었다. 이 당시 작은 학교에 불과했던 인창 초등학교가 '전국 국민학교 송구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의 전통이 인창 초등학교가 핸드볼 명문이 되는 밑거름이 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1941년 「조선 교육령」 개정으로 인창 국민학교로 부르게 되었으나 1950년 전쟁의 참화로 교실과 학교 시설 전부가 잿더미가 되었다. 가장 어린 학생들의 배움터가 사라진 것이다. 이후 1954년 10월, 미 1군단 후원으로 아홉 개 교실을 신축해 학교의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1971년에는 경기도 미술과 연구 학교로 지정되어 새로운 학습 방법을 개발하였다. 구리시 최초의 학교답게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경기도 교육에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한 셈이다. 그해 8월 말에는 본관 18개 교실과 별관 3개 교실이 증축되었다. 1986년 5월 30일에는 실내 체육관을 건립하였다. 구리 시내의 각종 기념 행사도 이곳에서 개최되곤 했다. 1992년에 경기도 교육청으로부터 유치원 교육 시범 학교로 지정되기도 했다. 1993년 3월 20일 본관 후면 3개 교실을 증축했으며, 1994년 4월 이후 급식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1997년 인창 초등학교로 개칭되었으며, 2000년에는 동인 초등학교가 분리 개교했다. 2003년에는 학교 공원화 사업으로 지역 사회 일원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행했으며, 2010년 29학급으로 편성되었다. 2011년에는 경기도 교육청 혁신 학교로 지정되었으며, 그해 개교 90주년 기념 축제 '거위의 꿈'이 개최되었다.
2. 구절양장 굽은 길, 곧은 마음 한세기 '서울 삼육 고등학교'
학교와 배움 자체가 생경했을 1906년 서울 삼육 고등학교의 역사가 시작된다. '삼육'이란 명칭은 사람을 창조한 하느님의 목적을 따라 지·덕·체의 균형된 발달을 도모한다는 건학 정신을 나타낸다. 설립 당시 서울 삼육 고등학교는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학교가 아니었다. 1906년 10월 10일에 선교사 스미스(R. W. Smith) 목사가 평안남도 순안군[현 북한 평양직할시 순안 구역]에 사립 의명 학교를 처음 개교한 것이 그 출발이다.
서울 삼육 고등학교는 구리 지역뿐만 아니라 한국 교육사에도 민족 교육의 시초가 될 만한 사학의 명문고로 꼽힌다. 1906년 설립 이후 중학교로 운영되다가 1937년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된다. 이로 인해 당시 교장이던 선교사 리 하만은 이경일 교장에게 교장직을 인계하였고, 1938년 신자 자녀 12명으로 서울 본부 교회에 3년제 중학 과정으로 삼육 학원을 개원하게 된다. 그러나 이 또한 1941년 일제 탄압으로 '삼육 농사 강습소'라 개칭하고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1947년 제1대 선교사 이제명 교장이 취임해 삼육 중학교 제1회 졸업생 50명을 배출하였다. 학교의 역사는 구절양장 굽은 길처럼 험난했다. 6·25 전쟁으로 다시 임시 휴교에 들어갔다. 1951년 1월 14일에는 제주도 성산포에 임시 개교를 하며 그 이름과 명맥을 이어갔다. 1952년 서울이 수복되자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학교를 개교하였다. 1956년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 교사로 건축 이전하였으며, 1961년에는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의 변경을 인가받았다. 1969년 7월 13일 교사 신축 기공식을 갖고 다음해 4월 신축 교사 준공으로 서울특별시에서 당시 경기도 남양주군 구리읍 교문리[현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90번지로 이전하였다.
서울 삼육 고등학교는 지금까지 사회 각계 각층에 8,000여 명의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단순한 교사 건물이었던 학교는 1995년 1월 25일 당시로 큰 금액인 5억 9000만 원을 투자해 1,396평의 초현대식 시설을 갖춘 건물로 갖추었다. 1998년 11월 17일에는 학생들의 더 나은 교육 활동을 위해 본관 건물 뒤편에 공사비 약 1억 원을 들여 1,042평의 특별실, 4억 6000만 원을 투자해 강당 옆에 1,195평의 학생관을 건축하는 등 교육 여건 개선에 선두적인 모습을 보였다. 2003년 4월 24일 학급 증설로 인하여 본관 옆에 지하 1층, 지상 2층에 총 1,273평의 쾌적한 교실을 건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창 초등학교]
1. 뿌리 깊은 나무로 자라다
인창 초등학교의 특징은 오랜 전통과 역사를 들 수 있다. 100년을 바라보는 세월 동안 2만 명이 넘는 동문들을 배출했으며 이들이 사회의 각계 각층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도 큰 자산이다. 학교 운영은 2011년 경기도 교육청으로부터 혁신 학교로 지정된 점에서 알 수 있듯 교수의 학습 방법과 눈높이에 맞춘 프로그램이 특징이다. 그간 인창 초등학교는 학부모, 교사가 모두 참여하는 체험, 창의 위주의 교욱을 선도해 왔다. 특히 자기 주도 학습 공책 '스터디 플래너(Study Planner)'와 중간 놀이 시간 활용을 통해 성장 과정을 확인하고, 배려하는 심성을 키워 가도록 뒷받침해 왔다. 동아리 활동과 통합 교육 과정 운영, 책 읽어 주기와 아침 20분 독서 등 교육 혁신을 실천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운영해 오고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이 원만히 정착하고 활용되기 위해서는 참여와 소통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이유로 참여와 소통의 학교 공동체 만들기도 인창 초등학교가 힘쏟고 있는 부분이다. 특히 학부모들로부터 교육의 공공성을 지키고 사교육의 롤러코스터에 아이들을 태우지 않겠다는 지지와 협력을 구하며 여러 시도들을 하고 있다. 인창 초등학교는 매월 한번씩 학교 운영 위원회를 열고 학교 카페도 활성화해 학교 운영에 관해 아이들과 어머니들의 소통의 장을 마련하고 있으며, 어머니 도우미 강좌 등 학부모 지원 프로그램도 다양하다. 또한 자녀의 자기 주도 학습과 자존감 높이기, 교육 과정 평가에 대해서도 의견 수렴을 위해 '다모임'과 같은 기구를 만들었다.
2. 신교육의 열매를 맺다
인창 초등학교는 학교가 설립될 때의 정신을 살려 항상 변화를 모색하고 독창적인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선구자'로서 역할을 해 오고 있다. 학생들은 '기록'을 통해 생각을 키우는 '스터디 플래너'를 활용해 꼭 해야 할 일과 자신이 읽은 책을 기록하고, 알림장, 건강 줄넘기, 실천해야 할 공부와 목표에 대해서도 기록하면서 초등학교에서부터 자기 관리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뒷받침하고 있다. 교사와 학부모의 참여도 학생들의 실천력을 높이는 요인이 된다.
놀 때 '몰입'해서 놀 수 있어야 공부할 때도 집중할 수 있다. 인창 초등학교는 공부할 때와 놀 때를 가리지 않고 집중력을 향상시키는 방안으로 40분 수업에 10분 휴식이라는 기존의 방식을 벗어 던지고 '블록 수업'제를 운영하고 있다. 80분 수업에 30분 휴식으로 수업 목표에 따라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주고, 쉬는 시간 또한 넉넉히 주는 형태이다. 스몰 스쿨제의 운영도 혁신적인 교육 방침으로 1학년에서 6학년까지 학년만 구분해 놓은 게 아니라 전 학년을 대상으로 바른 스쿨[1~2학년], 슬기 스쿨[3~4학년], 튼튼 스쿨[5~6학년] 과정으로 나누어 운영한다. 주제의 구분도 이루어져 있으며 각 스쿨 교사들의 협의를 통해 교육 활동 프로그램이 생산된다.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도 인창 초등학교가 명맥을 유지하고 100년 역사를 바라 볼 수 있게 된 것은 무엇보다 아이들의 꿈을 이루어 주고자 하는 단순하지만 순수한 교육 방침 덕분이었다. 어린이들이 스스로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의 적성과 소질을 이끌어 내는데 학교가 밑거름이 되어 주는 것이다. 학생들은 매월 1·3주 토요일에 50개의 동아리에 20명씩 모여 활동하는 '5020'프로그램에 참여해 자신의 적성에 맞는 동아리 활동을 즐긴다. 댄스와 난타, 묘기 축구, 스마트폰을 활용한 영화 제작, 저글링, 합주, 택견, 합창, 밴드 등 프로그램도 다양하다. 자치 활동 프로그램인 '다모임'은 학급별로 한 주에 1회씩 칭찬과 반성을 하는 시간이다.
그 밖에 전통적인 인창 초등학교의 대표적 자랑거리를 꼽으라면 단연 핸드볼부를 들 수 있다. 매년 전국 대회 및 각종 대회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서울 삼육 고등학교]
1. 산속 정원에 학교가 내려 앉다
서울 삼육 고등학교의 특징으로 학교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인 이상적인 환경을 꼽을 수 있다. 특히 도시의 공해와 소음에 항상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청소년들에게 자유로운 교실과 깨끗한 환경을 제공해 산속 정원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2015년 현재 총 24학급 814여 명의 학생과 53명의 교직원이 근무 중이다. 우리나라 초창기 사립 학교들처럼 남녀 공학제와 기숙사를 갖추고 있다.
서울 삼육 고등학교의 기본 이념인 '참된 교육'은 어떤 연구 과목을 이수하는 것 이상의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생활을 위하여 준비하는 것 이상의 것을 발휘한다. 참된 교육은 전인 교육이어야 하며 평생 교육이어야 한다. 즉 지·덕·체의 능력이 일생 동안 균형되고 원만하게 발달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2.학교가 살아야 마을이 산다
도심의 아이들은 방과 후 학원으로 내몰리고 시골의 학교는 학생이 없어 폐교되는 곳이 부지기수다. 학교 교육은 십 년 대계가 아니라 백년대계다. 선조들과 선교사의 교육 의지를 통해 100년을 지켜 낸 서을 삼육 고등학교가 건내는 일성은 오늘날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교육의 목적이 무엇인지. 교육의 초심이 무엇인지를 100년 한 세기 동안 구절양장처럼 굽이굽이 어려운 길을 걸어온 서울 삼육 고등학교가 보여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