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20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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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the Korean War and Playing the Tap of Min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서종원 |
[정의]
6·25전쟁의 결과가 남긴 경기도 구리시 지역의 놀이 방법.
[6.25 전쟁 당시 구리 지역의 상황]
6·25전쟁이 일어나자 구리 지역은 순식간에 북한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북한이 점령 지역에서 실시한 정책은 해방 후 북한 지역에서 실시한 제반 사회 개혁 정책을 준용한 것이었다. 첫 단계는 점령하자마자 지역 정권 기관으로서 임시 인민 위원회를 구성하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남한 지역의 108개 군, 1,168개 면에서 ‘지방 정권 기관 선거'라는 것을 진행하여 각급 인민 위원회를 복구했다. 이들은 또한 토지 개혁을 실시하였다. 토지 개혁은 무상 몰수 무상 분배 등이 토지 개혁의 핵심 내용이었다. 구리 지역 역시 이러한 흐름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구리에서도 인민 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의용군도 모집하였다. 남자들은 남양주와 양평을 이어 주는 양수 다리와 퇴계원 방면의 다리 복구 작업에, 여자들은 이들의 식사를 제공하는 데에 동원되었다.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전쟁은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을 계기로 대반격이 일어난다. 유엔군은 서울을 향해 진격하였고, 9월 20일에는 한강을 도하하여 행주산성을 장악한 다음, 25일에는 마포까지 진출한다. 이날 새벽 6시 국군 17연대와 미 32연대도 한강 도하 작전을 실시하여 서빙고와 보광동, 한남동 일대에 진출하였고 자정 무렵에는 한양 대학교 부근의 살곶이와 무학봉, 화양리까지 진군하였다.
26일 국군 17연대 1대대와 3대대는 아차산 줄기를 따라 북진하였다. 오후 반나절이 지나서 용마봉을 점령하고 다시 그 북쪽 292고지를 확보하였다. 그날 저녁 국군 17연대 1대대와 3대대는 망우리 고개에 도착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경춘 국도를 차단하였다. 이 과정에서 진격하는 국군 17연대 병력과 후퇴하는 인민군 병력은 불과 200~300m를 사이에 두고 혈전이 벌어졌다. 당시 유엔군은 최대 당면 목표인 서울 탈환에 병력을 집중하기 위하여 망우리 고개에서 이동 지역으로의 진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날부터 구리 지역 일대에서 국군과 인민군과의 격전이 3일간 전개되었다.
최대 격전은 26일 밤 11시부터 약 4시간 동안 전개되었다. 1개 대대 병력의 인민군이 국군 2개 대대 사이를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인민군은 500여 명의 병력 손실을 입고 물러갔으나 국군의 손실도 막심하였다. 이후에도 인민군의 야간 공격은 계속되었다. 이때의 교전으로 구리 주민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전쟁을 피해 아차산으로 피난을 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다. 9월29일 서울을 탈환한 국군은 병력을 서울 주변에 투입하였다. 구리 방면에는 해병대 병력이 투입되어, 후퇴하는 인민군을 팔당리와 마석우리까지 추격하였다.
여느 지역이나 마찬가지였겠지만 6.25 전쟁이 일어나던 해 구리 주민들은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인창동이 고향인 강자현[1941년생, 남]은 왕숙천 건너 응골에서 논으로 들어오는 잉어를 잡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대포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처음엔 폭죽 소리인줄 알고 가만히 있다가 전쟁인 걸 알고서 급히 피난을 가기 위해 미음 나루까지 갔으나, 이미 한강 다리가 끊겨 다시 마을로 돌아와야만 했다.
일부 피난을 갔겠지만 대다수의 주민들은 전쟁이 발발한 초기엔 피난을 갈 수가 없었다. 앞서 살펴봤듯이 서울과 인접한 연유로 북쪽의 팔로군[인민군]들이 일찍 구리 지역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을 피해 피난을 가거나 혹은 숨어 있다 발각이 되면 곧바로 총살을 당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 여러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피난을 가지 못한 주민들 가운데 성인들은 팔로군에게 발각이 되지 않기 위해 방공호를 파고 숨어 지내야만 했다. 어린 아이들과 여성들은 팔로군에게 잡혀도 무서울 게 없었지만 성인들, 특히 성인 남자들은 그들에게 발각되면 목숨을 잃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아래 내용은 전쟁 당시 구리 주민이 겪은 실화인데, 이를 통해 당시의 조마조마했던 주민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저녁에 내가 겪은 이야기 중에 하나가 우리 할머니, 나, 내 동생 그렇게 방에서 자고 우리 그 부엌 뒤에 방공호를 팠어, 방공호를 팠는데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 작은아버지 나이 먹은 어른들 거기 몇이 들어가 계셨는데, 대문을 와서 두드리는 거여. 인민군이 총을 들고 들어 와서 날보고 일어나 보래. 일어나 보니 그때는 못 먹고 그래서 휘어져 있잖아. 그러니까 도로 드러 누으라고 그래서 내 동생하고 둘이 다 일어났다가 드러눕고, 그러고는 이제 우리 할머니가 계신데 그놈들이 부엌 뒤에 저기 방공호 있는 쪽으로 가다가, 조금 가다가 그냥 다시 돌아 나오더라고, 그러고선 그 괜찮았지. 그놈이 가고선 딴 놈이 또 안 들어 왔어. [만약에 거기 잡혔으면 큰일 날 뻔했겠네요?] 우리 아버지, 우리 할아버지 그냥 다 초상나는 날이지."[박명섭, 2016. 1. 4.]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남한을 점령한 팔로군들은 구리 지역에도 임시 부대를 설치하였다. 팔로군들은 낮에는 민가로 들어가 마을 주민들을 밭으로 내보내고 집에 있는 음식을 먹으며 잠시 쉬거나 숙면을 취했다. 매일 밤마다 전쟁을 치러야 하니, 그런 방법을 동원한 것이다. 특히 9월 28일 서울 수복 때 우리의 아군이 아차산을 장악하면서 전투는 여느 때보다 치열했다. 해가 지면 팔로군들은 아군이 있는 곳까지 진격을 하여 전투를 벌였다. 그러다 해가 뜨면 후퇴를 하여 민가로 돌아왔는데, 그 이유는 비행기에 발각되어 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아군의 승리로 팔로군들이 마을을 떠났지만 팔로군들이 마을에 머물러 있는 동안 구리 주민들은 숨죽이며 살아야만 했다.
팔로군이 떠난 뒤로 구리 주민들은 한동안 전쟁을 체감하지 못했다. 그러다 1.4 후퇴가 시작되면서 주민들 대부분이 피난길에 올랐다. 무작정 남쪽으로 내려간 사람도 있으며, 경기도 남쪽에 있는 친척집으로 피난을 간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다행히 한강이 모두 얼어 우마차에 살림살이를 실고 강을 건너 남쪽으로 향할 수 있었다. 벌말이 고향인 박명섭 씨는 평택 근처에 다다랐을 무렵 중공군을 만났는데, 중공군에게서 전쟁이 끝났으니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듣고 구리로 돌아왔다고 한다.
[전쟁이 남긴 잔흔]
6·25전쟁은 실로 우리 민족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전쟁으로 인한 인적, 물적 피해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였다. 남북한을 합쳐 250만여 명이 죽거나 실종되었고 부상자까지 합하면 당시 전체 인구의 1/6에 이르는 500여만 명이 피해를 입었다. 또한 엄청난 수의 이재민과 전쟁고아, 1000만에 달하는 이산가족을 낳았다. 물질적 피해 또한 컸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와 상처는 구리 지역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을이 불에 타 형체를 알 수 없는 곳도 많았고 전쟁을 위해 목숨을 잃거나 가족을 잃은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전쟁으로 면사무소가 완전 파괴되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전쟁이 마무되었지만 구리 주민들은 오랫동안 전쟁의 치유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노력을 한다고 한들 6·25전쟁의 기억을 쉽사리 떨칠 순 없었다. 보금자리였던 집이 폐허가 되고, 논이며 밭, 심지어 마을 골목길과 집안 마당 등에 놓인 시체를 접하는 일 자체가 특히 곤욕스러웠다. 주민들은 시체 옆에 땅을 깊게 파고 시신을 굴러 떨어뜨린 다음 흙으로 묻어 버리는 식으로 처리하였다. 수백 명이 넘는 시체를 땅에 묻는 작업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정말 힘든 일이었다. 또한 무너진 담을 다시 세우고, 피해를 입은 학교와 관공서 등을 복원하기 위한 재건 사업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비록 전쟁이 주민들의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으나 구리 주민들은 전쟁의 상처를 벗고 일상 생활로 복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남과 북의 휴정 협정 논의가 있었던 1953년에는 ‘휴정 협정 반대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구리 지역의 학생들과 일반인들이 상경을 하는 일도 있었다.
주민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쟁으로 인한 잔흔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주민들 능력으로 해결하거나 처리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지뢰 제거이다. 전쟁이 진행되는 도중 미군은 중국 인민 지원군의 진격을 지체시키기 위해 구리 토평동부터 동구릉까지 지뢰를 설치하였다. 전세가 다시 역전되어 중국 인민 지원군이 북쪽으로 밀려가고, 피난을 떠난 주민들이 구리로 돌아온 이후에도 지뢰밭은 그대로 남게 되었다. 지뢰는 휴전 이후에 미군에 의해서 제거되었으나 완벽하게 제거가 되지 않은 탓에 주민들의 피해는 물론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경향 신문』 1952년 2월 9일 자에는 '미 제◯ 부대에 배속된 시내 중부(中部) 경철서 이관숙(李寬叔) 경사는 지난 □□ 오후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九里面) 내에서 통행인들에게 위험 지대를 피하도록 안내하다가 괴뢰군이 매설하고 도망한 지뢰가 폭발되어 오른 발목이 짤려 시민 위생 병원에 입원 가료 중에 있다.'라는 기사가 나온다.
1952년의 사건은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벌어진 일이라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문제는 이러한 사건·사고가 시간이 흐른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는 데 있다. 1953년도에 ‘비무장 지대의 위험물 제거 군사 정전위 합의’가 이루어지긴 했으나, 이는 비무장 지대에 국한되어 있을 뿐 남한 전 지역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뒤 예산 부족 등의 이유로 전국 여러 곳에 묻어둔 지뢰를 포함한 폭발물들은 그대로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1969년도의 사정에서 이러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경향 신문』 1969년 5월 10일 자에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에서는 포성이 가신 지 20년 지난 후까지도 해마다 지뢰, 수류탄 등 폭발물에 의한 사고로 목숨을 잃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치안국 집계에 의하면 지난 1968년 한 해 동안 62명이 숨지고 158명이 불구가 되었으며 올해[1969년] 들어서 4월말까지 이미 29명이 숨지고 60명이 부상을 입었다."라는 기사가 나온다.
이들 폭발물은 오랫동안 제거하기 위해 노력을 펼쳤지만, 미처 발견되지 못했던 것이 빗물 등으로 밖으로 노출되면서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1973년 자료[『동아 일보』, 1973. 5. 29.]에는 봄, 가을에 각각 27건, 24건으로 사고가 비교적 많았는데, 그 이유는 겨울에 쌓였던 눈이 녹아내리거나 여름철 장마로 흙이 깎이면서 파묻혔던 폭발물이 노출되었기 때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역별로 경기 27건, 강원 14건으로 많았다. 두 지역이 다른 지역에 비해 폭발물 사고가 많은 것은 이들 지역이 6.25 당시 격전지였고 지금도 휴전선의 관할 지역으로 군부대가 많은 데서 원인을 찾고 있다. 그리고 폭발물 사고의 피해자 절반 이상이 20세 미만의 청소년들인데, 1969년도에는 135명의 사상자[사망 34명, 부상 101명]가 발생하였다.
한편, 전쟁이 끝난 뒤 구리 지역에는 탱크 저지선이 설치되었다. 하지만 근래에 오면서 없어졌다. 교통에 불편을 주기도 하고 외관상으로 좋지 않다는 주민들의 의견이 반영된 결과이다.
[전쟁이 남긴 지뢰꼭지놀이와 탄피 놀이]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군은 서울의 태릉은 물론, 왕숙천, 벌말, 동구릉 주위에 철조망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그 밑으로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는 지뢰를 묻어 놓았다. 특히 왕숙천과 동구릉 주변에 지뢰가 많이 매장되어 있었다. 전쟁이 끝났음에도 지뢰를 처리하지 못한 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관련이 있긴 하지만 전국에 산재해 있는 지뢰를 일일이 제거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땅에 묻힌 지뢰는 주민들의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어른들은 지뢰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가급적이면 그 근처에 가지 않았으며, 아이들에게도 지뢰가 있는 곳은 절대 가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하지만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을 잠시 잊은 채 지뢰밭 근처에 떨어진 탄피를 주어 오기도 하고, 지뢰의 뇌관이라 할 수 있는 꼭지를 떼어 왔다. 탄피의 경우는 철조망 근처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던 곳이면 어느 곳이나 상관없이 탄피가 널려져 있었다. 간혹 총알 탄피보다 큰 대포 탄피를 발견할 때도 있었다. 탄피를 줍다 보면 발포되지 않은 것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런 것들은 주어다 행정 기관에 신고를 하면 일괄적으로 처리를 하였다. 아이들은 주로 발포가 된 총알 탄피를 줍는다. 다른 지역처럼 탄피를 모아 파는 아이도 있었지만 대부분 놀이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이러한 행동을 하였다.
아이들은 땅바닥에 삼각형 모양을 그린 다음, 그곳에 일정한 탄피를 놓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맞추는 놀이를 자주 하였다. 다른 탄피를 던져 삼각형 안의 탄피를 넘어뜨리거나 맞추면 그걸 가져갈 수가 있었다. 놀이 방법은 구슬치기와 유사한데, 구슬이 아닌 탄피라는 게 다를 뿐이다. 손안에 들고 있는 탄피의 개수를 맞추며 노는 경우도 있었으나 주로 이 방법으로 놀이를 하였다. 놀이를 통해 상대방의 탄피를 따먹기 위한 목적이 강했으나 전쟁으로 인해 마땅한 놀이 도구가 없다 보니 이런 놀이를 많이 한 것으로 보인다. 어떤 아이는 놀이를 잘해 집 안에 탄피를 수북하게 쌓아 두었다고 한다.
탄피를 가지고 노는 놀이는 사고 위험성이 적어 문제될 게 없었지만 남자 아이들 중심으로 행해졌던 지뢰꼭지놀이는 목숨을 잃거나 다치는 경우가 빈번했다. 지뢰꼭지놀이를 하기 위해서는 지뢰에 달린 꼭지가 필요한데, 그것을 떼어 내는 것 자체가 무척 위험한 일이었다. 죽을지도 모르는 가운데 아이들이 지뢰 꼭지를 얻으려 했던 것은 그걸 이용해 총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지뢰 꼭지가 뇌관 역할을 할 수 있기에, 나무와 파이프 등으로 총의 전체적인 틀과 총구를 만든 다음 지뢰 꼭지를 설치하면 실제 총과 다름이 없었다. 지뢰 꼭지는 결국 방아쇠를 잡아당기면 총의 뇌관을 때리는 역할을 한 셈이다. 지리 꼭지를 이용해 만든 총은 실제 총에 견주어도 될 만큼 성능이 뛰어났다. 그렇게 만든 총을 가지고 아이들은 일정한 거리에 병과 깡통을 세워놓고 맞추기도 하고, 날아가는 새를 잡는 데도 사용하였다.
문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지뢰 근처에 가서 지뢰꼭지를 떼어 오는 게 쉽지 않다는 데 있다. 그래서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담도 크고 배짱도 있는 아이가 아니면 그 근처에 갈 수도 없었다. 또한 기술도 있어야 했다. 땅에 매장된 지뢰는 선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를 밟으면 다른 것들도 연쇄적으로 터지도록 설치하기 위한 장치이다. 그래서 지뢰의 맨 꼭대기에 연결된 지뢰 꼭지를 얻으려면 먼저 양옆의 지뢰가 터지지 않게 연결선을 가져간 핀으로 고정시킨다. 양쪽 두 개를 고정하고 나면 가운데 놓인 지뢰로 가서 꼭지를 떼어도 폭발이 되지 않도록 다시 핀으로 고정한다. 그런 다음 조심스레 지뢰 꼭지를 돌려가며 빼는데, 그렇게 하면 무사히 지뢰 꼭지만을 뗄 수가 있다.
하지만 이 과정은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함께 간 아이들과의 호흡도 중요하고, 자칫 실수를 하거나 지뢰가 놓인 곳으로 가는 도중에 다른 지뢰를 밟아서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았다. 정확한 통계가 있는 건 아니지만 조사 과정에서 만난 제보자는 지뢰 꼭지를 빼러 다니는 아이들 셋 중 한 명은 죽거나 다쳤다고 한다. 그럼에도 아이들이 그 놀이를 그만두지 못했던 것은 스릴감과 재미를 동시에 주었기 때문일 게다. 전쟁으로 관심 밖에 있던 구리 지역 아이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그런 놀이를 할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현실을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