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거 성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21002
한자 世居姓氏
영어공식명칭 Family Name Residing for Generati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기도 구리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미엽

[정의]

여러 대(代)에 걸쳐 경기도 구리시에서 살아오고 있는 성씨(姓氏).

[개설]

17세기경 구리 지역에 집성촌(集姓村)이 형성되었을 때 지금의 구리시는 경기도 양주에 소속되어 있었다. 구리시의 세거 성씨에 관한 기록은 1934년 조선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의 성씨(朝鮮の姓氏)』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해방 이후에도 『경기도지(京畿道誌)』 양주군 구리면에서 소개되고 있다. 최근의 자료로는 1996년 발간된 『구리시지』에서 과거 대성(大姓)으로 비교적 많은 가구 수가 거주하는 성씨들을 현지 조사를 통해 정리하였다.

2000년대 이후에는 『(2000 인구 주택 총조사) 성씨 및 본관 집계 결과-시군구』를 통해 구리시의 성씨를 파악하였다. 그 결과 해방 전후로는 15~16개의 성씨가 구리 지역 여러 마을에서 집성촌을 이루어 세거하였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주민들이 서울 등으로 이주하고, 구리 지역의 도시화와 함께 다수의 인구가 외부에서 유입되면서 많은 곳이 각성받이 마을로 바뀌었으며, 다만 1990년대 중반 『구리시지』 편찬을 위한 조사 때 7개의 마을에서 여전히 적지 않은 수가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기록으로 본 근현대 구리 지역 세거 성씨]

1. 『조선의 성씨(朝鮮の姓氏)』(조선 총독부, 1934)에 나타난 1930년 양주군 구리면의 세거 성씨

중하리 해주 최씨[22세대], 인창리 해주 최씨[29세대]와 김해 김씨[21세대], 교문리·중하리 밀양 박씨[34세대], 묵동리 김해 김씨[25세대], 수택리 김해 김씨[26세대]·한양 조씨[24세대], 토평리 경주 김씨[20세대], 신내리 파평 윤씨[22세대]·경주 임씨[37세대], 망우리 동래 정씨[20세대], 갈매리 순흥 안씨[34세대]·성주 이씨[33세대], 사노리 밀양 추씨[15세대], 아천리 전주 이씨[15세대] 등 총15개의 집성촌에 367세대가 거주하였다.

2. 『경기도지』(경기도지 편찬 위원회, 1955)에 나타난 1953년 양주군 구리면의 세거 성씨

중하리 해주 최씨[22세대], 인창리 해주 최씨[45세대]·창원 황씨[20세대]·김해 김씨[30세대], 교문리 밀양 박씨[30세대], 묵동리 김해 김씨[24세대], 수택리 김해 김씨[22세대], 토평리 경주 김씨[21세대], 신내리 경주 임씨[60세대], 망우리 밀양 박씨[21세대]·송산 정씨[29세대], 갈매리 순흥 안씨[42세대]·벽진 이씨[31세대]·밀양 박씨[20세대], 아천리 김해 김씨[24세대]·전주 이씨[29세대] 등 총16개의 집성촌에 470세대가 거주하였다.

3. 『구리시지』(구리시, 1996)에 나타난 1996년경 구리시의 세거 성씨

인창동 해주 최씨: 해주 최씨 좌랑공파는 15세손 최정(崔埥)을 중시조, 21세손 최선(崔漩)을 입향 시조로 한다. 최선의 묘소는 구리시 수택동의 속칭 검배에 위치하고 있으며, 1960년까지만 해도 전체 75호 중 타성은 10여 호였다. 1996년 당시에는 도시화로 인해 외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입주해 살고 있었으며, 그 해주 최씨도 약 200여 호 거주하였다. 한편 입향조의 묘역은 수택동 황락산 부근이었는데 도시 정비 지구로 개발되면서 경기도 양주시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수택동 해주 윤씨: 해주 윤씨는 1994년 기준으로 전국적으로 50여 호에 인구 350여 명에 불과한 소성(小姓)이다. 해주 윤씨는 서흥 윤씨라고도 하는데, 세보에 따르면 1세 윤공재로부터 5세 윤길생까지의 묘역이 서흥군 동부방(東部坊) 남재궁동(南齊宮洞)이었고, 6세 이후의 묘역은 구리시 수택동 ‘검배’ 마을 황락산 아래이다. 한편 1996년경 조사 당시 구리시에 거주하는 해주 윤씨는 약 100명이고, 인근 경기도 남양주시에도 약 90명이 세거하였다고 한다.

수택동 벽진 이씨: 이총언(李悤言)을 시조로 한다. 벽진 이씨 판결사공파(判決事公派)가 구리시 갈매동에 거주하고, 수택동 새벌말에는 이희조(李希祖)를 파시조로 삼는 도정공파(都正公波)가 다수 거주하였다.

갈매동 벽진 이씨: 갈매동 도촌·양지말·넘말·봉대미 마을에 벽진 이씨 판결사공파 40여 호가 살았다. 원래 이들의 호적에는 본관이 성주로 되어 있었으나 종친회를 결성하고 활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본관이 벽진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1986년 법원에 본관 변경 신청을 하여 1987년 허가를 받았다.

갈매동 순흥 안씨: 갈매동에는 순흥 안씨 참판공파(參判公派)가 해방 이후부터 1996년까지 약 80여 호가 거주하였다. 순흥 안씨는 고려 시대 안자미(安子美)를 시조로 하며, 참판공파는 안종신(安從臣)을 파시조로 한다. 갈매동에 묘소가 있는 안세인(安世仁)·안세일(安世逸)을 입향조로 추정한다.

사노동 신안 주씨: 신안 주씨의 한국 시조는 주희의 증손인 주잠(朱潛)이다. 조사 당시 구리시 사노동의 주씨는 웅천파였으나 1960년 이전에는 본관을 경주로 하였고, 총 75여 호 중 45여 호는 사노동 양짓말에, 나머지는 토평동수택동 및 남양주시 진접읍 일대에 거주하였다. 입향 시조는 23세인 청계공(淸溪公) 주계수(朱戒守)로 추정하며 스스로 청계공파라고 한다.

교문동 밀양 박씨: 구리시 교문동의 ‘박촌’은 밀양 박씨 호군공파(護軍公派) 30여 호가 거주하였다. 호군공파는 규정공파(糾正公派)의 지파로 27대까지로 내려온다. 교문동의 박촌은 해방 전후로 50~60호를 이루었던 큰 마을이었다.

[현황]

성씨 분포와 관련한 가장 최근 자료인 2000년 11월 통계청의 조사에 의하면, 구리시 총인구 160,485명 중 가장 많이 세거하고 있는 성씨는 34,793명의 김씨(金氏)로, 그중 김해 김씨가 14,297명, 경주 김씨가 6,889명이었다. 이씨(李氏)는 24,853명 중 경주 이씨가 4,440명, 전주 이씨가 3,222명이었으며, 박씨(朴氏)는 13,201명으로 밀양 박씨가 10,185명을 차지하였다. 최씨(崔氏)는 7,645명 중 경주 최씨가 2,983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정씨(鄭氏)는 6,226명 중 동래 정씨가 1,125명, 경주 정씨가 1,008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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