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21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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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句麗 |
영어공식명칭 | Goguryeo |
분야 | 역사/ 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고구려 |
집필자 | 최상기 |
[정의]
경기도 구리 지역을 포함한 한반도 중부 지역을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영유했던 한국 고대의 국가.
[개설]
고구려(高句麗)는 압록강 유역에서 기원한 후 주변 지역을 향해 동심원 형태로 팽창했다. 남쪽으로는 한반도 북서부 지역이 첫 번째 목표가 되었고 이어서 구리 지역을 포함한 한반도 중부 지역으로 향했다. 이 과정에서 한강 하류 유역에서 등장한 백제(百濟)와의 갈등이 빈번히 발생했다. 고구려는 광개토왕(廣開土王) 시기에 확립한 우위를 바탕으로 장수왕(長壽王) 시기에 백제를 남쪽으로 밀어내며 한강 유역 일대를 차지했다. 그리고 고구려는 새롭게 확보한 한반도 중부 지역에 행정 단위를 설치하고 군대를 배치하며 영역화를 시도했다. 고구려의 지배는 한동안 유지되었으나 6세기 중반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에 의해 한강 유역을 포함한 경기도와 강원도 지역을 상실함으로써 종료되었다. 한편 아차산 일대는 한강 하류 유역의 중요한 요충지였으므로 고구려와 백제·신라 사이에서 벌어진 분쟁의 중요 무대가 되었다.
[고구려의 남진과 아차산]
고구려와 백제는 한반도 북서부 지역에 있었던 중국 왕조의 행정 단위인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 지역[지금의 황해도 및 평안도 남부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경쟁했고, 두 나라의 사이에 있었던 낙랑군과 대방군의 소멸로 영역을 직접 접하게 된 이후 고구려와 백제의 갈등은 더욱 치열해졌다. 4세기 중후반까지는 백제가 우세해서 평양을 공격한 근초고왕(近肖古王)과 백제군을 방어하던 중에 고국원왕(故國原王)이 전사하는 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4세기 후반 광개토왕의 즉위 이후 고구려와 백제의 우열 관계는 역전되었다. 특히 「광개토왕릉비문(廣開土王陵碑文)」에 따르면 396년 광개토왕이 지휘하는 고구려군이 한강 유역에 있던 백제의 성들을 함락시킨 후 한강을 건너 백제의 도성(都城)을 포위 공격한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고구려군이 함락한 성들 중에는 지금의 아차산성에 해당한다고 추정되는 아단성(阿旦城)이 포함되어 있었다. 286년에 백제의 책계왕(責稽王)이 한강 하류 남쪽 연안에 위치한 도성의 방어를 위해 강 건너편의 아차산에 아단성을 축조했을 만큼 아차산은 일찍부터 요충지로 기능했고, 고구려군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백제의 도성을 포위하기 전에 아단성과 아차산 일대를 공략·평정한 것이다. 광개토왕을 이은 장수왕은 남쪽으로의 팽창을 더욱 강화했고, 결국 475년 백제의 도성인 한성(漢城)을 함락시키고 개로왕(蓋鹵王)을 사로잡아 처형함으로써 한강 유역 일대를 차지했다. 아차산 일대를 비롯한 구리 지역도 이 시기에 고구려의 영역에 편입되었다고 보인다.
[고구려의 구리 지역 경영]
고구려는 장수왕 시기에 구리 지역을 포함한 한반도 중부 지역을 확보한 후 이 지역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시행했다. 우선 한강 하류 북부 지역에 평상시의 통치 거점으로 남평양(南平壤)[평양으로도 불렸지만 대동강 유역의 평양과 다르다]을 건설했고 백제의 도성이었던 한성을 남진을 위한 전진 기지로 재활용했다. 그리고 아차산 일대 산들의 능선을 따라 조밀하게 보루(堡壘)들을 축조하고 군대를 주둔시켜 미래에 발생할 수도 있는 백제 및 신라와의 충돌에 대비했다. 또한 고구려에서는 지방 행정 단위로서 '성(城)[시설물이 아니라 일정한 영역을 갖는 행정 단위의 명칭] 혹은 군(郡)'을 운용했는데, 한강 하류 유역에는 약 6개의 '성 혹은 군'이 설정되었다고 추정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에 따르면 남평양은 신라의 광역 지방 행정 단위인 한주(漢州) 예하의 한양군(漢陽郡)에 해당하며 고구려에서는 북한산군(北漢山郡)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아울러 군에 속한 하위 행정 단위로 '현(縣)'이 있었는데, 북한산군에 속했다고 추정되는 고구려의 골의노현(骨衣奴縣)이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일대에 설치되었고 구리 지역도 당시에는 골의노현의 영역 안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고구려는 구리 지역을 포함한 한반도 중부 지역을 자신들의 기준에 근거해 안정적으로 편제·경영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의 후퇴와 백제·신라의 북진]
고구려는 한반도 중부 지역을 확보한 이후에도 한동안 남쪽으로의 팽창을 이어갔다. 그러나 동맹 관계였던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남진을 효과적으로 저지했고, 특히 6세기에 접어들면서 국내의 혼란을 수습한 백제의 무령왕(武寧王)과 무령왕을 이은 성왕(聖王)이 한강 유역 회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공세를 취했다. 수세적 입장에 처한 고구려는 전진 기지였던 몽촌토성[과거 백제의 한성]을 포기하고, 대신 한강과 아차산 일대의 보루들로 구성된 방어선을 중심으로 한강 북쪽 연안 지역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544년 말 안원왕(安原王)의 사망 이후 지배 세력 사이에서 발생한 왕위 계승 분쟁으로 고구려의 정세가 혼란한 틈을 타 백제와 신라는 함께 북진했다. 결국 551년 백제는 한강 하류 유역의 6개 군을, 신라는 한강 상류 유역의 10개 성[군]을 차지하면서 고구려의 한반도 중부 지역 영유는 종료되었다. 구리 지역은 다시 백제의 영역이 되었지만 2년 후인 553년 신라가 기습적으로 한강 하류 유역을 점령하면서 새롭게 신라의 영역에 편입되었다. 고구려는 이후 여러 차례 한반도 중부 지역으로 다시 진출하려 했지만, 아단성 아래에서 신라군과 교전 중 사망한 온달(溫達)이 상징하듯이 고구려의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