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21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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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麗時代 |
영어공식명칭 | Koryŏ Period |
이칭/별칭 | 고려 시기 |
분야 | 역사/ 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김미엽 |
[정의]
918년부터 1392년까지 고려 왕조가 지속되던 시기의 경기도 구리 지역의 역사와 문화.
[개설]
장기간에 걸친 평화가 지속된 통일 신라는 하대(下代)로 갈수록 골품제의 한계에 따른 왕위 쟁탈전이 계속되었고, 지방 통제력의 상실로 조세 징수의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한반도는 쇠잔해진 신라와 왕건의 고려, 그리고 견훤의 후백제로 나뉘었는데, 양주(楊州)라는 명칭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궁예전에 처음 등장하고 있다. 양주는 10세기 초 포천 지역의 호족인 명지성(命旨城) 장군 성달(成達)과 양주 지역의 호족인 능현(能玄)이 왕건에 귀부하면서 고려의 영향권에 들어갔으며, 935년 왕건에게 귀순한 후백제 견훤의 식읍(食邑)이 되기도 하였다. 통일 과업을 완수한 936년부터 1392년까지 경기 북부 지역의 행정 구역이 양주목(楊州牧), 양주, 남경(南京), 한양부(漢陽府)로 변천됨에 따라 현 구리 지역도 여기에 속하여 함께 변천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전기]
983년(성종 2)에 고려 조정은 전국 주요 지역 12개에 목(牧)을 설치했다. 구리 지역이 속한 경기 동북부 지역은 양주목에 포함되었다. 같은 해 호장(戶長)과 부호장(副戶長) 등 이직(吏職)이 마련되고 주·부·군·현 등에 공수전(公須田)이 지급된 것으로 볼 때 중앙에 의한 행정 조직의 기초가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995년(성종 14) 고려의 지방 제도는 크게 개편되었다. 10도제를 실시하고, 종래 주목을 파견하였던 12주(州)를 12군(軍)으로 개편하면서 지방관도 절도사(節度使)로 바꾸고, 도단련사(都團練使)·단련사(團練使)·자사(刺史)를 두었다. 따라서 양주도 10도 중 하나인 관내도(關內道)에 포함되었는데 양주의 지방관은 좌신책군 절도사(楊州左神策軍節度使), 해주는 우신책군 절도사(海州右神策軍節度使)로 삼아 좌우 2보(輔)라고 칭하였다. 하지만 1012년(현종 3년) 2보와 12절도사의 제도를 폐지하고 안무사(安撫使)를 두었으며, 1018년(현종 9) 4도호부 8목 56지주사 및 지군사, 28진장 20현으로 개편할 때, 당시 양주목은 지주사(知州事)로 강등되었다. 1067년(문종 21년) 동경(東京)·서경(西京)과 함께 양주는 남경(南京)으로 승격되어 고려 3경 중의 하나로 부상하였다. 이것은 풍수지리학의 영향으로 양주를 포함한 남경이 쇠락해진 개경을 대신할 도성 터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이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숙종(肅宗)이 남경을 다시 설치하려 하였고, 남경으로 논의된 곳은 조선 시대의 노원(蘆原)과 해등(海等) 지역으로, 이 지역은 구리 지역 일부가 편입되었던 노해면(蘆海面)으로 추정된다.
[고려 후기]
1308년(충선왕 즉위년) 서경과 동경이 격하되었을 때 남경도 한양부(漢陽府)로 격하되었다. 이는 지방 세력을 억제하고 중앙에서 더 많은 관리를 파견함으로써 중앙 집중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에서 실행된 것이다. 부윤(府尹)과 판관(判官)·사록(司祿) 등의 관리가 파견되어 중앙 정부의 직접적인 관할하에 들어갔고, 수도인 개경과 근접하다는 이유로 장단·풍양과 함께 왕실의 사냥터가 되었다. 고려말 공민왕 대 남경 천도론이 다시 등장하였다가 반대로 인해 천도는 실패하였고, 1382년(우왕 7) 남경 천도를 결정하고 그해 9월 직접 왕이 거둥하여 6개월간이나 남경에 머물면서 천도를 준비하였으나 위화도 회군으로 실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