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22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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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Goguryeo taking Hanseong and the death of King Gaero |
분야 | 역사/ 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최상기 |
[정의]
경기도 구리 지역에 있는 아차산성 아래에서 고구려군에 의해 백제 개로왕(蓋鹵王)이 처형당하고 도성(都城)인 한성(漢城)이 함락당한 사건.
[개설]
백제는 건국 이후 고구려와 서로 다툼을 거듭하다가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이후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백제 개로왕은 고구려의 압력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 외교 정책을 펼쳤으나 475년 9월 고구려군의 침공으로 구리 지역의 아차산성에서 개로왕은 죽임을 당하고 도성인 한성은 함락당하였다.
[역사적 배경]
온조(溫祚)가 한강 하류 유역에서 백제를 세운 이후, 백제와 고구려는 서로 다툼을 거듭했다. 초기에는 한반도 북서부 지역에 있었던 중국 왕조의 군현(郡縣)인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에 대한 영향력을 두고 갈등을 겪었고,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 있었던 두 군현이 없어지고 직접 경계가 닿게 된 이후에는 분쟁이 더 심해졌다. 4세기 근초고왕(近肖古王) 시기에는 백제군이 북진해 평양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전사시킬 만큼 우위를 점했지만, 광개토태왕 이후에는 백제의 아신왕(阿莘王)이 영원한 복종을 맹세할 만큼 백제가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고구려와의 긴장 관계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즉위한 개로왕은 고구려의 압력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움직임을 보였는데, 특히 중국 남조(南朝)의 왕조들과 교류하던 기존 방침에서 벗어나 북조(北朝)의 북위(北魏)에 국서(國書)를 보내 고구려를 협공할 것을 제안할 만큼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개로왕의 이러한 시도는 북위의 거절로 성공하지 못했고, 오히려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의 침공을 일으키게 되었다.
[경과]
장수왕은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승려 도림(道琳)을 간첩으로 파견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백제에 잠입해 바둑과 장기 등으로 개로왕의 환심을 산 도림은 국왕 권위의 회복을 명목으로 개로왕에게 성곽과 왕궁의 보수, 선왕(先王) 무덤의 축조, 대규모 제방의 건설 등을 추천했고 개로왕이 도림의 권고를 모두 받아들인 결과 백제의 국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알아챈 장수왕은 3만 명의 군대를 지휘해 백제를 침공했고, 곧 도성인 한성을 포위한 후 공격을 감행했다. 한편 근래에는 개로왕이 실시한 각종 토목 사업들이 단순히 도림의 속임수에 넘어간 결과가 아니라 중앙 집권 체제의 정비를 위한 것이었고, 특히 대규모 제방 건설은 도성 방어용 시설물을 마련하려는 목적이었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했다.
[결과]
당시 백제의 도성은 평상시에 거주하는 북성(北城)[지금의 풍납토성]과 비상시에 요새로 사용하는 남성(南城)[지금의 몽촌토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고구려군은 북성을 7일만에 함락시킨 후 곧바로 남성을 공격했고, 남성으로 피신했던 개로왕은 남성 함락 직전 도주했으나 결국 고구려군에 사로잡힌 후 아차성(阿且城)[지금의 아차산성]으로 끌려가 처형당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개로왕을 사로잡은 고구려군의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爾萬年)은 본래 백제인이었지만 죄를 짓고 고구려로 달아난 인물이라고 하는데,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을 개로왕의 왕권 강화 과정에서 발생한 정변 중에 축출된 자들이라고 본 견해도 있다. 한편 개로왕은 함락 직전 동생인 문주(文周)[『삼국사기』에서는 개로왕의 아들이라고 했지만 다른 문헌 기록들을 감안하면 동생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를 동맹 관계였던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신라 조정은 구원병 1만 명을 파견했지만, 문주와 신라군은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해 한성 함락과 개로왕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다.
[의의와 평가]
고구려가 백제의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처형함으로써 고구려는 광개토태왕 이래로 추진한 남진 정책에서 일정한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특히 전통적으로 정치·경제·군사·교통의 요충지였던 한강 유역을 확보함으로써 고구려는 한층 더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확보하게 되었다. 반면 백제는 도성과 국왕을 잃은 후 가까스로 웅진(熊津)[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에 다시 도읍을 정하고 문주가 왕으로 즉위함으로써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한동안의 혼란은 피할 수 없었다. 이처럼 고구려의 한성 함락과 개로왕의 죽음은 5세기 후반 이후 한반도의 역사 전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