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32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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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牧場址 |
영어공식명칭 | Farm Site |
이칭/별칭 | 아차산 장성(峨嵯山 長城)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기도 구리시|서울특별시 광진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성신 |
[정의]
경기도 구리시 아차산과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에 걸쳐 있는 삼국 시대 또는 조선 시대 유구.
[개설]
목장지[아차산 장성]는 아차산 능선을 따라 망우리 공원묘역까지 남아 있는 유구(遺構)[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이다. 학자들은 이 유구가 「사복시 살곶이 목장 지도」에 수록된 것을 근거로 조선 시대의 목장지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일대에 고구려 보루를 비롯한 삼국 시대 보루들이 대거 축성된 것을 고려할 때 삼국 시대의 장성이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다. 즉, 원래는 삼국 시대의 장성이었으나 조선 시대에 성벽을 담장으로 재활용하여 목장으로 사용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현재 이 유적에 대한 발굴 조사는 진행되지 않았다.
[형태·구성]
목장지 축대 기단부의 폭은 대략 2~3m, 상부의 폭은 2m, 석축의 높이는 2m 내외이다. 석재는 다듬어지지 않았고, 큰 석재를 아래에 작은 석재를 위에 놓았으나 석축 방법은 치밀하지 못하다.
[가치 및 의미]
목장지[아차산 장성]는 축조 시기와 목적과 관련해 두 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하나는 조선 시대에 처음 축조되었으며, 처음부터 목장지였을 거라는 견해이다. 다른 하나는 본래 삼국 시대에 장성으로 처음 축성되어 군사용으로 사용되다가 조선 시대에 성벽을 재활용해 목장의 담장으로 사용했을 것이라는 견해이다. 아직까지 해당 유구에 대한 발굴 조사는 진행된 바가 없기에 결론을 성급히 내리지 않는 것이 타당할 것이며, 여기에서는 각각의 견해가 내세우는 근거만을 간략히 살핀다.
1. 목장지로만 보는 견해: 확인된 아차산 장성 석축의 높이는 0.5~1.5m 정도인데, 주변에 흩어져 있는 석재의 양이 많지 않으므로 원래의 높이도 2m 내외로 보고 있다. 석재는 다듬어지지 않은 데다가 석축 방법도 치밀하지 못하다. 또한 석축 외부보다 내부의 경사가 급한데 이는 외부의 공격을 방어하기보다는 내부의 무언가를 보호하기 위한 구조에 가깝다. 게다가 석축을 사방으로 쌓은 것이 아니라 능선상의 남북으로 길게 쌓은 것은 사방을 경계하는 일반적인 장성의 모습이 아니다. 이러한 이유 등으로 이 유구는 방어를 위한 장성이 아니라고 파악한다.
2. 장성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견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대에 조성된 수많은 보루들과의 연관성을 고려하는 견해이다. 즉, 고구려 군대의 특징은 기마 병력에 있으며, 아차산 일대의 보루들이 약 500~700m 정도의 간격을 두고 축조되어 있는 것을 감안하면 기마 병력이 지나갈 수 있도록 보루와 보루를 연결하는 통로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발굴 조사가 진행된 아차산 4보루에서 말과 관련된 철제 유물이 출토되었고, 성벽 또는 담장의 높이가 2m 내외로 낮음에도 폭은 2~2.5m로 비교적 넓은 편이다. 만약 처음부터 아차산 장성이 목장지였다면 굳이 석축을 쌓을 필요 없이 목책 등을 쌓는 것이 비용이나 여러 가지 면에서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감안하면 목장지가 본래 장성이었을 거라는 견해도 충분히 타당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