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320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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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景陵神道碑 |
영어공식명칭 | Memorial stone for Gyeongreung |
이칭/별칭 | 경릉 표석(表石) |
분야 | 역사/ 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9-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상기 |
[정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경릉의 신도비.
[개설]
경릉 신도비(景陵神道碑)는 헌종(憲宗)·효현 왕후(孝顯王后)·효정 왕후(孝定王后)의 능인 경릉(景陵)에 세워진 신도비이다. 헌종은 조선의 24대 왕으로 1827년(순조 27) 출생해 1830년(순조 30) 왕세손으로 책봉되었고, 1834년(순조 34) 11월 8세의 나이로 즉위한 후 1849년에 후사 없이 사망했다. 효현 왕후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영흥 부원군(永興府院君) 김조근(金祖根)의 딸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828년(순조 28) 출생해 1837년(헌종 3) 왕비로 책봉되었고, 1843년 병으로 사망했다. 효정 왕후는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익풍 부원군(益豊府院君) 홍재룡(洪在龍)의 딸로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1831년(순조 31)에 출생해 1844년(헌종 10)에 왕비로 책봉되었고, 1903년(고종 40)에 사망했다.
[건립 경위]
경릉 신도비는 1908년(순종 2)에 세워졌다. 본래 경릉에는 1843년에 사망한 효현 왕후를 매장하면서 세운 표석이 있었고, 1849년에 사망한 헌종을 매장하면서 헌종과 효현 왕후의 합봉비(合封碑)를 세웠으며, 1903년에 사망한 효정 왕후도 경릉에 매장하면서 1904년(고종 41)에 헌종·효현 왕후·효정 왕후의 합봉비를 건립했었다. 『고종실록(高宗實錄)』에 따르면 1904년 1월 18일 고종이 1849년에 세운 합봉비의 앞뒷면을 깨끗이 갈아서 새로 내용을 새기도록 했고, 이후 『순종실록(純宗實錄)』에 따르면 1908년 6월 27일 헌종과 두 왕후를 황제와 황후로 추존(追尊)한 내용을 기존의 합봉비 뒷면에 추가로 기록해 현재의 신도비를 건립했음을 알 수 있다.
[위치]
경릉 신도비는 헌종·효현 왕후·효정 왕후의 봉분 서쪽 석축에서 남서쪽으로 약 60m 떨어진 비각 안에 있다.
[형태]
경릉 신도비는 네모반듯한 모양의 농대석(籠臺石)[비석의 받침돌] 위에 남포석으로 만든 비신(碑身)을 세운 후 그 위에 한옥의 지붕 모양을 본뜬 가첨석(加檐石)[지붕돌]을 얹은 형태이다. 전체 높이는 318.2㎝이며 가첨석·비신·농대석의 높이는 각각 62.3㎝·191.9㎝·64.0㎝이다. 전체 너비[농대석 너비도 동일]는 126.5㎝이며 가첨석·비신의 너비는 각각 120.3㎝·65.7㎝이다. 전체 두께[가첨석 두께도 동일]는 102.6㎝이며 비신·농대석의 두께는 각각 47.0㎝·99.5㎝이다. 가첨석은 팔작지붕의 모습을 갖추었지만 상세한 표현은 생략되었고 처마선은 수평에 가깝다. 농대석은 1단이며 문양을 새기지 않았다.
[금석문]
경릉 신도비의 비신 앞면에는 전서(篆書)로 '대한 헌종성황제경릉 효현성황후부좌 효정성황후부좌(大韓 憲宗成皇帝景陵 孝顯成皇后祔左 孝定成皇后祔左)'라고 썼고, 헌종·효현 왕후·효정 왕후의 생몰일·책봉일·장례일 및 추존 사실 등을 기록한 뒷면의 음기(陰記)는 예조 판서와 이조 판서 등을 역임한 윤용구(尹用求)가 해서(楷書)로 썼다.
[현황]
경릉 신도비는 현재 사적 제193호로 지정된 동구릉 내에 있다. 문화재청 조선 왕릉 관리소 동부 지구 관리소에서 관리하고 있고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의의와 평가]
경릉 신도비는 1682년(숙종 8)에 건립된 영릉(寧陵)[효종(孝宗)과 효종의 비 인선 왕후(仁宣王后)의 능] 표석 이후 점점 간략화되어 영조(英祖)·정조(正祖) 시기에 확립된 조선 왕실 신도비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으며, 글씨도 조선 후기에서 대한 제국 시기까지의 경향을 따르고 있음을 잘 보여 주는 문화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