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320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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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九里東九陵崇陵丁字閣 |
영어공식명칭 | T-shaped house of Sungreung |
분야 | 역사/ 전통 시대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11-2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상기 |
[정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숭릉의 정(丁) 자형 제사건물.
[개설]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九里 東九陵 崇陵 丁字閣)은 1674년(숙종 즉위)에 건립되었다. 조선 현종(顯宗)과 현종의 비 명성 왕후(明聖王后)의 능인 숭릉(崇陵)의 제사용 건물이다. 3년상 중에는 이곳에서 조석상식(朝夕上食)[혼백·신주에 아침과 저녁으로 음식을 차리는 의식]과 주다례(晝茶禮)[낮에 지내는 차례]가 이루어졌고, 3년상 이후에는 여러 길례(吉禮)가 실시되었다.
[위치]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은 현종과 명성 왕후 무덤의 동쪽 석축에서 동쪽으로 약 80m 떨어진 곳에 있고, 그 중심축은 명성 왕후 무덤의 중심축과 대체로 일치한다.
[변천]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은 건립 이후 여러 차례 수리가 이루어졌다. 1828년(순조 28) 정자각의 월대를 개축했고, 1879년(고종 16)에도 수리가 이루어졌으며, 1899년(고종 36·광무 3)에는 정자각 배위청의 기둥을 보수했다. 광복 이후에도 몇 차례 수리되었고, 특히 1998년에는 문화재청의 주관 아래 해체 보수와 재단청이 이루어졌다.
[형태]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은 정면 5칸·측면 2칸의 정청(正廳)과 정면 1칸·측면 3칸의 배위청(拜位廳)으로 구성된 팔작지붕 건물이다. 정청 전면의 주칸은 440.0㎝, 좌우 협칸은 각각 313.0㎝, 좌우 익각(翼閣)은 각각 220.0㎝이며, 측면의 앞칸은 320.0㎝, 뒷칸은 337.0㎝이다. 배위청의 정면 길이는 정청 정면 주칸과 같고, 측면의 세 칸은 앞에서부터 각각 279.0㎝·282.0㎝·276.0㎝이다. 배위청은 5단의 장대석을 쌓아 조성한 기단 위에 다시 한 단을 쌓아 세웠고, 정청은 배위청쪽 기단보다 두 단 높은 기단 위에 한 단을 더 쌓은 후 세웠다.
조선 왕릉의 정자각은 건원릉(健元陵)[조선 태조(太祖)의 능] 정자각의 양식을 따른 5칸[정청 3칸과 배위청 2칸] 정자각과 광릉[세조(世祖)와 비 정희 왕후(貞喜王后)의 능] 정자각의 양식을 따른 8칸[정청 5칸과 배위청 3칸] 정자각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숭릉 정자각은 광릉 정자각을 전례로 삼아 8칸 정자각으로 건립되었다. 또한 숙종(肅宗) 대부터 왕릉에 영악전(靈幄殿)[무덤에 도착한 왕과 왕후 등의 관을 매장할 때까지 임시로 안치하던 곳]을 따로 세우지 않고 그 기능을 정자각으로 옮긴 결과, 국상(國喪) 중에는 정청의 주칸에 접한 배위청의 한 칸에 임시로 인방(引枋)·지방(地枋)·마루·분합문(分閤門) 등을 설치해 관을 모시는 동안 필요한 기물들을 배치하는 내부 공간으로 활용했다. 한편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의 계단은 배위청 북쪽에 향로계(香路階)와 어로계(御路階), 남쪽에 서계(西階)가 있고 정청 후면에 신계(神階)가 있다. 지붕 용마루의 끝에는 각각 취두(鷲頭)를 두었으며, 정청 지붕의 내림마루[용마루에서 추녀마루를 잇는 부분]에는 용두(龍頭)를 설치했고 배위청 지붕의 내림마루에는 용두와 함께 잡상(雜像)들을 2개씩 배치했다.
[현황]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은 2011년 12월 26일 보물 제1742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은 건립 당시의 모습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8칸 정자각의 전범이라고 할 수 있는 광릉 정자각을 비롯해 숭릉 이전에 건립된 다른 조선 왕릉의 8칸 정자각들 대부분이 임진왜란 이후 규모가 축소된 것과 달리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은 평면 규모 8칸의 형태를 그대로 보여 주는 드문 경우일 뿐만 아니라, 현재 남아 있는 조선 왕실의 정자각 중 유일하게 팔작지붕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또한 왕릉의 정자각에 영악전의 기능이 합쳐진 첫 번째 사례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