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32070 |
---|---|
한자 | 張德秀墓 |
영어공식명칭 | JangDeoksu Myo|Tomb of JangDeoksu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로 570[망우동 산57] |
시대 | 근현대 |
집필자 | 김명희 |
[정의]
경기도 구리시 망우 공원 묘지 내에 있는 정치가이자 언론인인 장덕수의 묘.
[개설]
장덕수(張德秀)[1895~1947]의 본관은 결성(結城), 호는 설산(雪山)이다. 1895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났다. 일본 유학 후 상하이로 건너가 신한청년당과 상하이 임시정부에 가담하였고, 임시 정부 외무부 차장 여운형의 통역으로 일본에 다녀오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하다가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 인촌 김성수가 『동아 일보』를 창간할 때 25세의 나이로 초대 주필이 되었고, 후에 부사장으로 참여했다. 일제 강점기 후반 중일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장덕수는 독립운동과 사회 운동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으나, 1938년 흥업 구락부 사건을 계기로 변절해 총독부 체제에 순응하면서 일제 전시 체제의 적극적인 협력자로 활동하였다.
[위치]
망우 공원묘지 관리소에서 순환로 오른쪽 방향 이동하면 길 중턱에 장덕수의 연보비가 있다. 연보비를 끼고 비탈진 오르막길을 오르면 커다란 평탄지에 장덕수와 부인의 합장묘가 있다[묘지 번호 109257].
[변천]
장덕수 묘는 부인인 박은혜가 1963년 10월 30일 사망하자 유해를 함께 묻고 비석을 개축해 합장한 것을 표시하였다.
[형태]
장덕수 묘는 사성(莎城)[무덤 위에 반달 모양으로 둘러막아 쌓은 둑]이 있고 봉분은 호석[둘레돌]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봉분 아래쪽에 단을 만들고 단 아래에 상석과 향로석(香爐石)[무덤 앞에 향로를 올려놓는 네모반듯한 돌]을 두었다. 봉분 우측으로 가첨석(加檐石)[지붕돌]을 올린 비석이 있다. 봉분의 단 아래에 문인석(文人石)[문관의 형상으로 능 앞에 세운 돌] 2기가 좌우로 있으며 그 아래쪽 중앙에 장명등(長明燈)[무덤 앞이나 절 안에 돌로 만들어 세우는 등]이 있다. 묘 입구 좌우로 망주석(望柱石)[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이 있다.
[금석문]
장덕수 묘비의 앞면에는 '설산장덕수박사 난석박은혜여사지묘(雪山張德秀博士 蘭石朴恩惠女史之墓)'라고 쓰여 있으며, 좌측과 후면에는 장덕수의 약력과 활동 사항이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