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32103 |
---|---|
한자 | 吳珽緯墓 |
영어공식명칭 | Oh Jeongwi Myo|Tomb of OhJeongwi |
분야 | 역사/ 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명희 |
[정의]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동복 오씨 묘역에 있는 오정위의 묘.
[개설]
오정위(吳挺緯)[1616∼1692]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군서(君瑞) 또는 서장(瑞章), 호는 동사(東沙)이다. 아버지는 관찰사 오단(吳端)이며, 어머니는 이조 판서 심액(沈詻)의 딸 청송 심씨(靑松沈氏)이다. 당숙 오전(吳竱)에게 입양되었다. 1645년(인조 2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1652년(효종 3) 홍문관 부교리와 수찬을 거쳐 1659년 승정원 승지 등을 역임하고 1664년(현종 5) 예조 참의가 되었다. 그 뒤 충청도 관찰사, 양주 목사, 경기도 관찰사를 거쳐 1672년 호조 판서, 형조 판서, 공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숙종 초에 서인 송시열에 대한 처벌 문제로 남인이 온건파와 강경파로 분열될 때 청남(淸南)에 속하여 강경론을 지지했다. 1677년(숙종 3)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예조 판서, 우참찬을 지냈다.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무안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삭주, 보성으로 이배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풀려나 공조 판서에 재등용되었고, 이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위치]
오정위 묘는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한다리 왼쪽 능선의 동복 오씨 묘역에 있다. 동복 오씨 묘역에 들어서면 초입에 오전의 묘가 있고 그 위에 쌍분으로 조성된 오정위의 묘가 있다.
[변천]
오정위 묘는 1984년 동복 오씨 묘역에 할아버지 오억령, 큰아버지 오익, 오정의 묘와 함께 조성되었다.
[형태]
오정위 묘는 일가가 종렬식으로 안장되어 있다. 오시만의 묘 바로 아래에 오정위로 추정되는 묘가 있는데 역시 명문이 없고 쌍분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아 부부의 묘로 추정된다. 사성(莎城)[무덤 뒤에 반달 모양으로 두둑하게 둘러싼 토성(土城)]은 없으며 쌍분의 봉분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영혼이 나와서 놀게 하기 위하여 무덤의 앞에 설치해 놓는 직사각형의 돌]은 없고 상석[가로 154㎝, 세로 9㎝]과 향로석[가로 32.5㎝, 세로 27.5㎝]이 있다. 상석은 좌우로 놓인 장대석 위에 있는데 장대석은 흙에 덮여 잘 보이지 않는다. 문인석(文人石)[문관의 형상으로 묘 앞에 세운 돌]은 두 쌍이 있는데, 향로석 좌우에 작은 문인석[높이 85㎝]이 있고, 묘 좌우로 망주석[높이 160㎝]과 한 쌍의 문인석[높이 160㎝]이 있다.
[금석문]
오정위 묘 오른쪽 20m 떨어진 곳에는 비석은 없이 연꽃 문양을 새긴 비석 대좌가 반쯤 파묻힌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