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330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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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尙鎔墓 |
영어공식명칭 | Kim Sangyong Tomb |
이칭/별칭 | 월파(月坡)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84-2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남선 |
[정의]
경기도 구리시 망우 공원 묘지 내에 있는 일제 강점기 시인 김상용의 묘.
[개설]
김상용(金尙鎔)[1902~1951]의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월파이다. 1917년에 경성 제일 고등 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학생 운동에 가담했다. 학생 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경성 제일 고등 보통학교에서 제적당하고 보성 고등 보통학교로 전학해 1921년에 졸업했다. 1922년에는 일본 도쿄로 건너가 1924년 릿쿄 대학 영문학과에 진학했으며, 1926년에 시 「일어나거라」를 10월 5일 『동아 일보』에 발표함으로써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1934년에 「남으로 창을 내겠오」를 『문장』에 발표했으며, 시 「나」를 『시원』 1호에 발표하는 등 『시원』에서 집중적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1939년 5월에 우수와 동양적인 체험이 깃든 관조적 경향의 서정시 27편을 수록한 유일한 시집 『망향(望鄕)』을 문장사에서 간행했다. 1943년 8월 1~8일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라는 친일 작품을 『매일 신보』에 발표하기도 했다. 1950년 9·28 수복 후 공보처 고문, 코리아 타임스사 사장을 역임하다가 1951년 부산으로 피난 가서 식중독으로 사망하였다.
[위치]
망우 공원 관리소를 지나 좌측 순환로 방향으로 가면 구리시 형제 약수터 이정표가 나오고, 그 이정표 아랫길 바로 오른쪽에 김상용의 묘가 있다[묘지 번호 109956].
[변천]
김상용의 묘는 1951년 6월 22일에 조성되었다.
[형태]
김상용의 묘는 토분 형태로 조성되어 있고, 묘 오른쪽 옆에 비석이 서 있다.
[금석문]
김상용 비문 앞면에는 '월파김상용지묘(月坡金尙鎔之墓)'라고 적혀 있다. 뒷면에는 '향수(월파선생시) 인적 끊진 산 속 / 돌을 베고 / 하늘을 보오 구름이 가고 / 있지도 않은 / 고향이 그립소 단기 사이팔구년륙月 이십사일고 월파선생이장위원회[鄕愁 (月坡先生時) 人跡 끊진 山 속 / 돌을 베고 / 하늘을 보오 구름이 가고 / 있지도 않은 / 故鄕이 그립소 團旗 四二八九年六月 二十四日故 月坡先生移葬委員會]'라고 적혀 있다. 왼쪽에는 '단기사이삼오년 팔월 십七日 경기도 연천서 나셔서 사이팔사년 유월 이십이일 부산서 도라 가셨고 사이팔구년 삼월 삼십일 이 자리에 옮겨 뫼시다(檀紀四二三五年 八月 十七日 京畿道 漣川서 나셔서 四二八四年 六月 二十二日 釜山서 도라 가셨고 四二八九年 三月 三十日 이 자리에 옮겨 뫼시다)'라고 쓰여 있다. 오른쪽에는 '영부인박애봉여사(단기 사이팔칠년이월육일 도라가심)는 여기 함께 뫼셨고 그 유가족은 장녀정호 차녀영호 장남 경호 삼녀명호 이남성호 사녀순호 오녀선호 삼남충호임[令夫人朴愛鳳女史(檀紀 四二八七年二月六日 도라가심)는 여기 함께 뫼셨고 그 遺家族은 長女貞浩 次女怜浩 長男 慶浩 三女明浩 二男聖浩 四女順浩 五女善浩 三男忠浩임]'이라고 쓰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