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33129 |
---|---|
한자 | 崔鶴松墓 |
영어공식명칭 | ChoeHaksong Myo|Tomb of ChoeHaksong |
이칭/별칭 | 서해(曙海)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로 570[망우동 산57-1]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남선 |
[정의]
경기도 구리시 망우 공원묘지에 있는 일제 강점기의 소설가 최학송의 묘.
[개설]
최학송(崔鶴松)[1901~1932] 은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서, 1910년 아버지가 간도 지방으로 떠나자 어머니와 함께 가난한 유년 시절과 소년 시절을 보냈다. 1915년에 성진 보통학교를 중퇴하고 가난 속에서 문학에 심취하였다. 1918년 간도로 건너가 방랑과 노동을 하면서 문학 공부를 계속하다, 1923년 간도에서 귀국하여 서해라는 필명을 사용하였다. 1924년 이광수의 소개로 경기도 양주 봉선사에서 승려 생활도 했으며, 작품 ‘고국’이 『조선 문단』에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하였다. 1925년 김기진의 권유로 카프[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 동맹]에 가입하고 『탈출기』 등을 발표하여 신경향파 문학의 기수로 각광받았다. 1929년 카프에서 탈퇴하고 『중외 일보』 기자로 일하다가 조선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 신보』 기자가 되었고, 창작집 『홍염』을 삼천리사에서 간행하였다. 1932년 7월 9일 위문 협착증으로 사망하였으며 장례는 한국 최초의 문인장으로 치러졌다.
[위치]
최학송의 묘는 망우 공원 관리 사무소를 오른쪽 순환로 방향으로 진행하면 연보비를 대신하는 문학비가 서 있고, 문학비에서 위로 올라가면 최학송의 묘가 있다[묘지 번호 205288].
[변천]
최학송의 묘는1932년 7월 9일에 서울 미아리 공동 묘지에 조성하였으나,1958년 9월 25일에 망우 공원묘지로 이장하였다.
[형태]
최학송의 묘는 토분 형태로 조성되어 있고, 묘 옆에는 비석이 있다. 묘 입구에는 우리 문학 기림회에서 만든 검은색 문학비가 있다.
[금석문]
최학송의 문학비 전면에는 ‘작가 崔鶴松 문학비(1901. 1. 21.~1932. 7. 9.) 여기에 최학송 (호 曙海) 선생이 잠들어 있다. 함북 성진 태생인 서해는 일제하 만주와 한반도를 전전하며 곤궁하게 살다 서울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하층민의 현실적 삶을 반영한 소설 「고국」, 「탈출기」, 「해돋이」, 「홍염」 등의 문제작을 남겼다. 후면 2004년 7월 9일 서해 서거 72주기에 우리 문학 기림 회원 이영구·김효자·이명숙·이명재·허형만·고임순·김원중·이응수·하혜정·노영희·임헌영·김성진·홍혜랑·임영봉·곽근 등이 짓고 황재국 써서 함께 세우다.’라고 쓰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