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420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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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世昌 |
영어공식명칭 | Oh Sechang |
이칭/별칭 | 중명(仲銘),위창(葦滄)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84-2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진각 |
[정의]
경기도 구리시 망우 공원 묘지에 안장된 개항기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개설]
오세창(吳世昌)[1864~1953]은 1902년 개화당 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하였다가 귀국해 『만세보』 사장과 『대한민보』 사장을 역임하였고, 대한 협회(大韓協會) 부회장을 지냈다. 3·1 독립 만세 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 중 1인으로 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민족 서화계의 정신적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가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중명(仲銘), 호는 위창(葦滄)이다. 아버지는 역관으로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오른 조선 말의 개화 사상가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이고, 어머니는 김해 김씨이다. 집안은 8대가 역관을 지낸 전형적인 중인 계층이었다.
[활동 사항]
오세창은 8세가 되던 해에 부친과 함께 초기 개화파를 대표하던 한의학자 유대치를 스승으로 모셨으며, 8년여의 연마 끝에 16세인 1879년에 역과에 합격하여 1880년부터 사역원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다. 1886년 개화파로서 박문국 주사이자 『한성순보』 기자를 겸하였다. 1894년에 군국기무처 총재 비서관이 되었고, 이어 농상공부 참서관과 통신원 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1897년 일본 문부성의 초청으로 동경 외국어 학교에서 조선어 교사로 1년간 체류하였다. 1902년 유길준이 일본 육군 사관 학교 출신 청년 장교들의 결사인 일심회와 함께 모의했던 쿠데타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일본에 망명하던 중에 손병희(孫秉熙)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1906년 귀국 후 『한성순보』기자 경력을 바탕으로 천도교 기관지 『만세보』의 사장에 취임했다. 이어 『대한민보』 사장을 역임하였으며, 대한 협회(大韓協會)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1918년에 근대적 미술가 단체의 효시인 대한 서화 협회가 결성될 때 13인의 발기인으로 참가하였으며, 민족 서화계의 정신적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3·1 독립 만세 운동 때에는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다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2년 손병희가 죽고 천도교 내에 보수파와 혁신파의 노선 투쟁이 격화되자 천도교인에 대한 설득에 나서기도 하였다.
한편, 출옥 후에는 일제의 감시 속에 자신의 집에 칩거하며, 서예가·전각가(篆刻家)·서예학과 금석학 역사가로 주로 활동했다. 해방 후 『서울 신문사』 명예 사장, 민주 의원, 대한민국 촉성 국민회장, 전국 애국 단체 총연합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6·25 전쟁 중에 대구에서 사망하였으며, 사회장이 거행되었다.
[학문과 저술]
오세창은 아버지와 자신이 수집한 옛 문헌과 고서화를 토대로 삼국 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한국 서화가에 관한 기록을 총 정리하여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을 펴냈다. 그 밖에도 조선 초기부터 근대에 걸친 서화가·문인학자들의 날인(捺印)된 인장 자료를 모아 『근역 인수(槿域印藪)』를 집성하였으며, 고려·조선의 서화 합벽책(合璧册) 『근역 화휘(槿域畫彙)』와 『근역 서휘(槿域書彙)』 등 우리나라 서화(書畫)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글씨는 전서와 예서를 즐겨 썼으며, 서화의 감식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전서와 예서를 혼합한 둥그스름한 독특한 서체를 창안했으며, 와당(瓦當)·고전(古錢)·갑골문 형태의 구성적인 작품도 시도하여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다.
[묘소]
오세창의 묘소는 구리시 교문동 망우 공원 묘지에 있다. 묘역의 연보비에는 '글과 그림이 대대로 일어나 끝내 사람에게서 없어지지 않은 것은 성품이 서로 비슷하고 사물의 근원이 있었던 까닭이다. 이에 솔거 이하 근래 사람에 이르기까지 서화(書畵)를 밝혀놓고 높고 낮음을 품평하였다.-『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서'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상훈과 추모]
오세창에게 1962년 건국 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