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420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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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曺奉岩 |
영어공식명칭 | Cho Bongam |
이칭/별칭 | 죽산(竹山)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84-2 |
시대 | 근대 |
집필자 | 정진각 |
[정의]
경기도 구리시 망우 공원 묘지에 안장된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정치인.
[가계]
조봉암(曺奉岩)[1899~1959]의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죽산(竹山)이다. 경기도 강화군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1911년 강화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강화군청 임시 사무 직원으로 근무했다. 강화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여하였다가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때 형무소 생활은 항일 운동의 길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출옥 후 1921년 일본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세이쏘꾸[正則] 영어 학교에서 영어를 배운 뒤 주오[中央] 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하였다. 이즈음 동경 유학생들이 조직한 사회주의·무정부주의 계열의 흑도회(黑濤會)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문학 작품과 사회과학 방면의 책을 두루 섭렵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며 사회주의 운동의 길을 걷게 되었다. 러시아 혁명을 주도한 볼셰비즘의 영향으로 북성회를 조직하여 항일 운동을 하다가 1922년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공산 청년회 대표로 중국 상하이[上海]를 거쳐 소련의 모스크바로 가서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하고, 1924년 코민테른의 지시로 공산주의 지도자 양성 기관인 모스크바 동방 노력자 공산 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에서 2년간 수학하였다. 1925년 조선 공산당의 모체인 화요회를 조직하였고 조선 공산당, 고려 공산 청년회의 간부가 되었다. 1926년 상하이에서 코민테른 원동부(遠東部) 조선 대표에 임명되었고, 한인 청년 동맹을 조직하여 항일 활동을 하다가 1932년 9월 8일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1945년 1월 헌병 사령부에 예비 검속되었다가 해방과 함께 석방되었다. 인천에서 치안 유지회·건국 준비 위원회·노동조합·실업자 대책 위원회 등을 조직하고, 조선 공산당 중앙 간부 겸 인천 지구 민전 의장(民戰議長)에 취임하였다. 1946년 폭력적인 혁명을 제창하는 과격한 공산주의에 회의를 느껴 그해 3월 박헌영(朴憲永)에게 충고하는 공개 서한을 발표하고 공산당을 탈당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제헌 국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인천에서 당선되었으며, 8월에는 초대 농림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농림부 장관 재임 동안 농민에게 유리한 농지 개혁 법안 작성과 농업 협동조합 운동을 전개했고, 농민 이익 단체의 조직도 시도하였으나 1949년 2월 사퇴하였다. 이후 1950년 제2대 국회 의원에 당선되어 국회 부의장에 선출되었으나 바로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다. 조봉암은 농림부 장관 사퇴 후 정치 운동을 더욱 본격화하여 1952년 제2대 대통령에 출마했으나 차점으로 낙선하였다. 1955년에는 혁신계 인사들과 함께 진보적인 대중 정당 창당을 추진하는 한편, 1956년 진보당 추진 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였다. 이 선거에서 조봉암은 예상외로 200여만 표를 얻어 이승만을 대체할 유력한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해 진보당(進步黨)을 창당, 위원장이 되어 정당 활동을 하다가 1958년 1월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대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1959년에 처형되었다.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의 무죄 판결로 신원이 복권되었다.
[묘소]
조봉암의 묘소는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망우 공원 묘역에 있다. 연보비에는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이 아니냐"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