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420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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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兢善 |
영어공식명칭 | Oh Geungseon |
이칭/별칭 | 중극(重克),해관(海觀)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84-2 |
시대 | 근대 |
집필자 | 정진각 |
[정의]
경기도 구리시 망우 공원 묘지에 안장된 일제 강점기 의학자, 사회 사업가, 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오긍선(吳兢善)[1878~1963]은 구한말의 의사, 사회 사업가이다. 배재 학당을 졸업하고 독립 협회, 만민 공동회에서 일하다가, 미국에 유학하여 루이빌 의과 대학을 졸업하여 피부과 의사가 되었다. 의학 공부와 함께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자격도 얻은 뒤 귀국하였으며, 군산, 광주, 목포 등 미국 남장로교 선교 지역인 호남에서 의료 선교를 통한 사회 사업에 종사하였다. 한편, 1934년에는 세브란스 의전 제2대 학교장 등을 지냈다. 해방 이후에는 잠시 한민당 창당과 구황실 재산 관리국 국장을 지냈으며 만년에는 사회 사업과 의료 활동, 교육 활동에 전념하였다.
[가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중극(重克), 호는 해관(海觀)이다. 아버지는 관찰사 오인묵(吳仁黙)이며 어머니는 한산 이씨(韓山 李氏)이다. 충청남도 공주 출신이다.
[활동 사항]
오긍선은 1896년 내부 주사(內部主事)를 지내다가 신학문을 배우기 위하여 배재 학당에 입학하였다. 학생으로서 1897년 독립 협회에 가입했고, 배재 학당 안에 조직된 학생 단체인 협성회의 간부로도 활약하였다. 그 뒤 이승만 등과 함께 만민 공동회의 간부로 활동하던 중 만민 공동회 사건으로 체포령이 내려져 충청남도 공주·논산과 전라북도 군산 등지로 피신하면서 침례교 선교사 스테드만(Steadman)의 집에서 개인 교사를 하면서 숨어 지냈다. 1900년 배재 학당을 졸업하고 스테드만에게 침례를 받았으며, 군산에서 선교사 알렉산더(Alexander)의 어학 교사로 일하였다. 침례교인으로 선교를 받았지만 후일 유학하면서 장로교도가 되었다.
1902년 미국 유학을 하여 켄터키주 센트럴 대학에서 화학과 물리학을 공부하였고, 켄터키주 루이빌 의과 대학에서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07년 루이빌 시립 병원 인턴으로 들어가 6개월간 피부과를 전공하였고, 같은 해 10월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로부터 한국 파견 선교사 자격을 얻어 6년 만에 귀국, 1909년 전북 군산 야소교 병원장이 되었다.
군산에 영명 중학교(永明中學校)를 설립하고 안락 학교(安樂學校) 및 교회를 설립하였다. 1910년 광주 야소교 병원장, 1911년 목포 야소교 병원장을 지냈으며, 목포 정명 여학교(貞明女學校) 교장직도 겸임하였다. 1912년에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 조교수 겸 진료 의사로 취임하였다. 1916년 4월부터 1년간 일본 도쿄 제국 대학 의학부에서 피부 비뇨기 과학을 전공하고 돌아와 세브란스 의학 전문 학교에 피부과를 신설하여 과장 겸 주임 교수가 되었다.
1919년에는 윤치호(尹致昊)와 함께 경성 보육원(京城保育院)을 설립하여 고아 양육 사업을 시작하였고, 1934년 에비슨 교장 후임으로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 교장이 되었다. 이때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를 일본 문부성 지정 학교로 승격시켰고, 인력과 시설을 확충시켰다. 한편 오긍선의 사회 사업과 선교 및 의료 사업이 선교사들을 통해 미국에도 알려져 1934년 모교인 센트럴 대학에서 자랑스러운 동문으로 추대하고 명예 이학 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또한 같은 해 루이빌 대학교[루이빌 의과 대학의 후신]에서는 명예 법학 박사를 수여하였다. 1942년 압력으로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 교장직을 사임하였다.
한편, 1921년 친일 세력이 조직한 유민회(維民會) 평의원으로 선임되었고, 1924년 동민회(同民會)에도 참여하였다. 1932년부터 1940년까지 조선 교육회 평의원을 지냈고, 1937년에는 경성 군사 후원 연맹 부회장이 되었다. 1938년 조선 지원병 제도 제정 축하 회의 발기인과 실행 위원을 맡았으며, 종교 활동을 통한 황민화 운동을 목표로 하는 조선 기독교 연합회 평의원으로 참여했다. 또 사상범의 전향을 촉진하는 경성 보호 관찰소의 주임 대우 촉탁 보호사로도 활동했다. 1939년에는 경성부 지원병 후원회 이사와 국민 정신 총동원 조선 연맹 상임 이사를 맡았다. 1941년에는 조선 임전 보국단 발기인 및 평의원이 되었다. 『반도의 빛』 1942년 1월호에 "임전하(臨戰下)에 신년을 마지하여"라는 글을 발표하였으며, 1943년 11월 6일자 『매일 신보』에 학도 지원병 지원 촉구를 위해 “대동아 건설을 위해 적국인 미국과 영국을 격멸하는 결전장으로 주저 없이 나설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1945년 해방 직후 한민당 계열에 합류하였고, 트루먼 대통령이 친서를 보내 미군정 민정 장관을 권해도 사양하였다. 조선 피부 비뇨기과 학회 명예 회장과 1946년 전국 사회 사업 연맹 이사장에 추대되었으며, 1948년에는 대한 기독교 서회 이사로 참여하였다. 이후 대한 성서 공회 이사장, 기독교 청년회 이사, 서울 여자 의과 대학 재단 이사 등을 지냈다. 제1 공화국 초 구황실 재산 관리 총국장을 지냈으나 이승만이 제안한 사회부 장관은 거절했다. 8·15 광복 후 안양 기독 보육원장에 있으면서 전국 사회 사업 연맹 이사장과 1952년 한국 사회 사업 연합회 회장을 맡는 등 사회 사업 분야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묘소]
오긍선의 묘소는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망우 공원 묘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서울특별시 시민 보건 위생 공로 감사장, 민간 사회 분야 사회 사업 공로 표창, 대한 의학 협회 의학 교육 공로 표창, 정부의 공익 포장(公益褒章), 새싹회 소파상(小波賞) 등을 수상하였다. 1981년 금관 문화 훈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