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420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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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池錫永 |
영어공식명칭 | JiSeokyeong |
이칭/별칭 | 공윤(公胤),송촌(松村)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84-2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진각 |
[정의]
경기도 구리시 망우 공원 묘지에 안장된 일제 강점기의 의학자이자 국어 학자.
[개설]
지석영(池錫永)[1855~1935]은 우리나라 최초로 종두법을 실시한 의학자이자 우두(牛痘) 보급의 선구자이다. 또한 국어 학자로서 한글 전용을 제창하였다.
[가계]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공윤(公胤), 호는 송촌(松村)이다. 아버지는 지익룡(池翼龍)이다.
[활동 사항]
지석영은 1855년 서울의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넷째 아들로 출생하여 한의사 박영선에게 한문과 의학을 배웠다. 중인 출신 한의사의 가르침이 지석영의 사상 형성과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1876년(고종 13) 박영선이 일본 수신사 일행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오다키[大瀧富川]에게 우두법을 배우고 구가[久我克明]의 『종두 귀감(種痘龜鑑)』을 얻어다 전해 주어 서양 의학에 눈을 떴다.
그 뒤 1879년 일본 해군이 세운 부산의 제생 의원(濟生醫院)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서울에서 20여 일을 걸어가 원장 마쓰마에[松前讓]와 군의(軍醫) 도즈카[戶塚積齊]를 만났다. 그곳에서 2개월간 종두법을 배우고 배움의 대가로 조일(朝日) 사전 편찬 작업을 도와주면서 국문법에 대한 관심도 갖게 됐다. 병원을 떠나면서 두묘(痘苗) 3병과 종묘침 2개, 접종 기구, 서양 의학 서적 몇 권을 받고 귀경길에 충청북도 충주군 덕산면의 처가에 들러 40여 명에게 우두를 놓아 주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사람에 의한 공개적인 종두법 실시의 시초이다. 이듬해 서울로 돌아와 종두를 실시하여 호평을 받았다.
지석영은 두묘의 제조법을 습득하기 위해 1880년 7월 제2차 수신사 일행에 끼어 일본에 들어간 뒤, 1개월 만에 종두 기술을 익히고 제조와 저장법 및 송아지의 사양법(飼養法)·채장법(採漿法) 등을 배웠다. 이후 두묘 50병을 얻어 가지고 귀국해 종두장(種痘場)을 세우고 우두 접종 사업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였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 때 종두장은 난민들의 방화로 불타 버렸다.
그 외에도 서양 의학의 도입과 이용후생에 유익한 서적 및 기계의 도입 등을 나라에 상소했고, 농서 『중맥설』과 의학서 『신학 신설』 등을 저술했다. 또한 전라도 어사 박영교(朴永敎)의 초청을 받아 전주에 우두국을 설치하고 종두를 실시하면서 종두법을 가르쳤고, 이듬해에는 충청도 어사 이용호(李容鎬)의 요청에 의하여 공주에도 우두국을 만들었다. 『한성순보(漢城旬報)』에 외국의 종두에 관한 기사가 실리면서 종두법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렇게 종두법의 보급에 진력하면서도 1883년 문과에 등제하여 성균관 전적과 사헌부 지평을 역임하였다.
1885년 지석영은 그 동안 쌓은 지식과 경험을 종합하여 우두의 실시, 천연두의 치료, 두묘의 제조, 독우의 사양법·채장법이 상세하게 서술된 『우두 신설』을 처음으로 펴냈다. 그해 우두 교수관으로서 전라도 지방을 순회하면서 시종(施種)을 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고, 1887년 전라남도 강진의 신지도에 유배되어서도 여전히 우두를 실시하였다. 1892년 유배에서 풀려 서울로 돌아왔으며, 이듬해 우두 보영당(牛痘保嬰堂)을 설립하여 많은 어린이들에게 시종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과 함께 위생국의 종두를 관장하게 되어 떳떳하게 우두를 보급할 수 있었다.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면서 형조 참의·승지를 거쳐 동래 부사를 지냈는데 임지에서도 우두 실시를 잊지 않았다. 학부대신에게 의학교 설립을 제의하였고, 1899년 의학교가 설치되자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지석영은 일본인 교사들을 초빙하고 일본 의학책을 번역하여 가르치게 하였다. 1902년 지석영의 제창으로 훈동(勳洞)에 의학교의 부속 병원이 설립되었고, 이듬해 의학교는 첫 졸업생 19명을 배출했다. 『황성신문』에 「양매창론(楊梅瘡論)」을 발표하여 매독의 해독을 대중에게 알렸고, 온역(瘟疫)[봄철에 유행하는 급성 전염병]·전염병·양매창(楊梅瘡)[악성 매독으로 인한 발진]의 예방법을 만들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1907년 의학교가 폐지되고 대한 의원 의육부(大韓醫院醫育部)로 개편됨과 함께 학감에 취임하였다.
한편, 지석영은 상소를 올려 “국문을 새로 개정해 나라의 자주와 부강을 도모”할 것을 건의하여 1905년 7월19일 ‘신정 국문(新訂國文)’을 공표했다. 1908년 국문 연구소 위원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자전석요』를 펴냈다.
지석영은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모든 공직을 버렸다. 1914년에 유유당(幼幼堂)이라는 소아과 의원을 열어 봉사를 시작했고 1915년에 전선 의생회(全鮮醫生會) 회장을 지냈다.
[학문과 저술]
지석영은 『중맥설(重麥說)』·『신학 신설(新學新說)』·『우두 신설(牛痘新說)』·『자전석요(字典釋要)』 등을 저술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망우 공원 묘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고종은 지석영의 공을 인정하여 태극장(太極章)·팔괘장(八卦章) 등을 하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