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420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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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潛 |
영어공식명칭 | Shin Jam |
이칭/별칭 | 원량,영천자,아차산인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미엽 |
[정의]
경기도 구리시 아차산에서 운둔하며 지낸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화가.
[개설]
신잠(申潛)[1491∼1554]의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원량(元亮), 호는 영천자(靈川子) 또는 아차산인(峨嵯山人)이다.
[가계]
신잠의 아버지는 신종호(申從濩)이고, 어머니는 세종 대왕의 제11자인 의창군(義昌君) 이강(李玒)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신주(申澍)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신숙주(申叔舟)이다. 형은 신항(申沆)이다.
[활동 사항]
신잠은 1513년(중종 8) 23세에 진사시에 장원하고 예조에서 실시한 향시에 합격하였다. 1519년 현량과가 신설되자 이에 합격하여 예문관 검열(禮文官檢閱)이 되었다. 곧이어 홍문관 부제학과 성균관 대제학이 되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현량과가 폐지되자 파직당해 어머니를 모시고 청주에서 잠시 기거하였다. 이후 신사무옥(辛巳誣獄) 때 안처겸(安處謙) 사건에 연루되어 장흥(長興)으로 귀양가서 17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였다. 1537년 양주로 이배(移配)되었고, 1538년 편의에 따라 거주하라는 명을 받았다. 이듬해에 어머니가 사망하자 아차산(峨嵯山) 아래에서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1543년 태인 현감(泰仁縣監)에 보임되어 흉년을 당한 백성들을 구제하였고, 1549년(명종 4) 강원도 간성 군수(干城郡守)로 나아가 군정을 살피는 한편, 산해(山海)의 명승지를 관람하고 그 느낌을 글로 남겼다. 1552년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부임하였다가 1554년 급환으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신잠은 문장과 예술에 능하였다. 시를 잘 짓고 초서와 예서에 조예가 깊었으며, 행서를 잘 썼고 난초와 대나무 그림을 잘 그려 삼절(三絶)이라고 칭하였다. 문집으로는 『영천집(靈川集)』이 있고,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탐매도(探梅圖)」와 「화조도(花鳥圖)」가 신잠의 그림으로 추정되고 있다.
[상훈과 추모]
신잠은 1696년(숙종 22) 전라도 유생 유지춘(柳之春) 등에 의해 태인현(泰仁縣)에 합향(合香)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