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43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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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熙道 |
영어공식명칭 | Park Heedo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84-2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우석 |
[정의]
경기도 구리시 망우 공원 묘지에 안장된 독립운동가.
[개설]
박희도(朴熙道)[1889~1951]는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독립 선언서에 서명하여 옥고를 치르는 등 독립운동을 벌였으나 1939년부터 일제에 협력하여 친일에 앞장섰다.
[가계]
박희도(朴熙道)[1889~1951]는 아버지 박계근(朴桂根)의 4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부인은 김희신(金熙信)이다.
[활동 사항]
박희도는 황해도 해주의 의창 학교 보통과와 고등과를 졸업하였다. 1904년 기독교인이 되어 평양 숭실 학교를 졸업하였으며, 협성 신학교와 연희 전문학교를 중퇴하였다. 이후 중앙 유치원과 영신 학교를 설립하여 교감이 되었고, 1916년 6월 조선 중앙 기독교 청년회의 회원 확대 운동에 참여하여 활약하였다. 1918년 6월 창의문 밖 교회 전도사가 되었고, 9월에는 조선 기독 청년회 회원부 간사를 맡았다. 그해 12월 일본 유학생 대표 송계백(宋繼白)에게서 2·8 독립 선언 계획과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를 전해 듣게 되었다. 1919년 1월 연희 전문학교 재학생인 김원벽(金元璧)과 의논하여 보성 전문학교와 연희 전문학교 등의 학생 대표들을 만나 국내 학생 중심으로 전 기독교인의 이름으로 독립 선언서를 발표할 것을 추진하였다. 그 뒤 천도교 측의 제안으로 거족적인 민족 운동을 계획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삼일 운동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독립 선언문에 서명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2년의 옥고를 치렀고, 1922년 11월 『신생활(新生活)』 제13호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함흥에서 2년간 옥고를 또다시 치렀다. 출옥한 이후에는 점차 자치론으로 경도되어 1939년 1월 친일 잡지 『동양지광(東洋之光)』을 창간해 사장을 맡았다. 1940년에는 국민 총력 조선 연맹과 조선 임전 보국단에서 활동하였고, 1943년에는 학병 독려 강연을 하는 등 친일 행적이 두드러졌다. 해방 후인 1948년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의 조사를 받았고 이듬해 풀려났다. 이후 육군 정훈 학교에서 강의를 하다가 1951년 병으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박희도의 저술 활동을 보면, 1922년 우리나라 최초의 순간(旬間) 잡지 『신생활』을 창간하였고, 1939년 1월 친일 잡지 『동양지광(東洋之光)』을 창간하였다. 1940년대는 일제의 정책에 협력하는 글을 적극적으로 쓰기도 하였는데, 「총후 국민의 급선무」(1941), 「일본은 왜 전쟁을 하는가」(1942), 「징병제 실시에 대한 공개 감사장」(1942), 「진심을 헌납하라」(1943), 「결전 비상의 때-궐기하라 반도 청년」(1944) 등이 그 예이다.
[묘소]
박희도의 묘는 망우 공원묘지 내의 부모 합장 묘 앞에 있다. 1958년 7월 8일 육군 정훈 학교 장병 이름으로 묘 앞에 묘비를 건립하였는데, 앞면에 "기미년 독립 선언 민족 대표 삼십삼인 중 고 박희도 선생지묘"라고 쓰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