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43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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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齊藤音作 |
영어공식명칭 | Saido Otosaku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84-2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
집필자 | 정진각 |
[정의]
경기도 구리시 망우공원묘지에 안장된 일제강점기의 일본인 임업가.
[개설]
'조선 치수, 치산 사업의 선각자'라 일컬어질 정도로 치산 사업에 관심을 표명하고 정책을 입안·추진한 일제강점기 일본인이며, 구리시 교문동 망우리 묘역에 묻혔다. 열성적인 기독교 신자로 알려져 있으며, 경성 일본 기독교회 장로로 활동하였다. 퇴임 후 조선 산림회에 관여하여 민간 식림(植林) 사업에 깊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활동 사항]
사이토 오토사쿠[齊藤音作][1866~1936]는 1891년 혼다[本多静六], 가와세[川瀬善太郎], 가와이[河合鈰太郎] 등과 함께 도쿄농림학교[도쿄농과대학 임학과]를 졸업하고 농상무성 산림국에서 근무하였다. 1895년 동경 우시고메[牛込] 일본 기독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해 청일 전쟁에 종군한 경험을 인정받아 대만 총독부 임이포무간서장(林圯埔撫墾署長)이 되고 혼다와 함께 옥산(玉山)[[新高山] 탐험에 성공하였다. 1899년 귀국 후, 이시카와[石川]현 기사를 거쳐서 1902년 야마나시[山梨]현 제6과 초대 과장으로 '삼림 정치(森林整治)'를 담당했다. 1906년부터 홋카이도청[北海道廳] 임정 과장으로 임용되어 국유림 존폐 구분의 실시, 가문비 나무·분비 나무의 천연 갱신법을 연구를 하고, 1908년 6월 1일 삿포로군 노보로[野幌]의 국유림 내에 내무성 노보로 임업 시험장을 설치하였다. 홋카이도청[北海道廳] 임정 과장 겸 지방 임업 과장 겸 임업 시험장장(林業試驗場長) 등을 역임하였다.
1910년 1월 대한 제국 산림국 기사로 초빙되어 왔다. 일제 강점 후 조선총독부 식산국 산림과 초대 과장으로 조선 임야 분포도를 제작하였고, 조선 삼림령(朝鮮森林令)을 작성하였으며, 기념식수 제도를 만들었다. 이 제도는 단순히 애림(愛林) 사상을 보급하는 것이 아니라 치산치수와 목재 생산을 의식하고 시행한 정책이었다.
1915년 영림창장(營林廠長)으로 신의주에 갔다가 1918년 퇴직과 동시에 조선 산림회를 창립하여 상담역이 되었다. 제국 삼림회가 설립되자 평의원이 되었고, 주식회사 황해사(黃海社) 임업부 고문의 이름으로 전 책임을 맡아 산림 신탁업부를 만들었다. 그 후 업무 일체를 계승하여 사이토[齋藤] 임업 사무소를 세워 조선의 녹화 및 활산 활수(活山活水)의 촉진에 노력하였다. 사이토 오토사쿠는 조림업에 매진 경성 로타리 클럽 회원으로서 활약하고 경성 기독교 청년회 평의원에 뽑히기도 했다.
사이토는 “원래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산을 소유한다고 하는 관념이 전혀 없었다. 그 때문에 조선인 대다수는 남벌 폭채(濫伐暴採)를 일삼고 식림을 행하는 것이 적었다. 산에 대한 소유권이 안정되어 있어야 자기 땅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 그러할 때에야 비로소 식림을 해야 한다는 의식도 생기는 법이다.”라고 하여 조선인들 사이에는 원래 임야 소유권 의식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로 임야 황폐 현상이 극심해졌다고 주장하였다.
[저술 및 작품]
1932년 경기도의 지침인 『조선 임업 투자의 유망』이라는 저서를 출간하였다.
[묘소]
경기도 구리시 교문 망우 공원 묘역에 묘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