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80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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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Galmae Maeul People and Dodanggut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서종원 |
[정의]
경기도 구리시 갈매동 주민들의 삶과 도당굿에 대한 이야기.
[개설]
오랜 역사를 지닌 갈매동 도당굿은 경기도 지역을 대표하는 마을굿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그 가치를 인정받아 경기도 무형 문화재 제15호[1995년 8월 10일 지정]로 지정되었다. 갈매동 도당굿은 격년으로 진행되며, 음력 2월 한 달간 준비를 해서 3월 초순에 지낸다.
[칡과 매화를 닮은 갈매마을]
구리 지역의 여러 마을 가운데 갈매동은 경기도 마을굿의 전형적인 모습을 지닌 도당굿이 행해지고 있는 마을로 유명하다. 갈매동은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에서 경기도 남양주시 퇴계원으로 빠지는 국도 47호선에 위치하고 있다. 행정 구역상으로는 경기도 구리시에 속하고 시의 북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중랑구 신내동과 접경 지역으로 서울특별시와 퇴계원이 주요 생활권이다. 갈매동은 50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고 전해진다. 마을 뒷산 너머에는 조선 시대의 여러 왕들이 묻혀 있는 동구릉이 있다.
갈매동의 지명은 산세가 칡과 매화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풍수상으로는 목마른 말이 물을 먹는 갈마음수(渴馬飮水) 형국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본래 경기도 양주군 노원면[지금의 노원구] 지역을 갈매라고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장기리와 구지면의 사노리 일부를 병합하여 갈매리라 이름하고 구리면에 편입하였다. 이후 1979년 갈매 출장소가 되었으며, 1980년 남양주에 편입되었다가, 1986년에 구리가 시로 승격되면서 갈매동이 되었다. 갈매동에는 여러 개의 자연 마을이 있다. 정씨네 마을인 정촌말, 너머 마을인 넘말, 범이 나타났다고 하여 붙여진 범말, 그리고 양지말, 도촌, 안말, 축동 등이 대표적인 자연 마을이다. 예전에는 마을 주위에 호랑이가 많아서 호환을 입은 사람이 많았던 탓에 '호랑이 안방'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마을 앞으로는 작은 개울인 도천(島川)이 도촌 마을을 휘감고 흐르는데, 포천에서 발원하는 왕숙천으로 흘러들어 한강으로 빠진다. 저수지나 보를 형성할 만한 여건이 못 되어 천수답으로만 농사짓던 곳이다.
갈매동의 정확한 역사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한 현실에서 갈매동의 최초 입촌자(入村者)는 알 수 없다. 다만 주민들은 청주 정씨가 처음 터를 잡은 것으로 보고 있다. 뒤를 이어서 남양 홍씨, 벽진 이씨, 순흥 안씨가 입촌하였고, 밀양 박씨가 나중에 들어왔다고 한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순흥 안씨와 벽진 이씨가 가장 많이 거주해 있었다. 시대에 따라 인구수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8·15 해방 당시만 하더라도 150여 호가 거주해 있었다. 갈매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본토인의 비율이 높다. 1990년대의 자료에 따르면 3대 이상을 산 사람이 무려 90%가 넘었다.
지금이야 인근에 큰 시장과 마트가 생겨 주민들이 가까운 곳에서 장을 보지만 예전에는 서울의 청량리와 왕십리, 그리고 동대문이 주민들의 생활권이었다. 도촌이나 점촌 마을 주민들은 인근 야산에서 해 놓은 땔감을 청량리 등에 내다 팔았다. 교통편이 발달되지 않아 주로 걸어서 다녔는데 신내동, 중랑교, 청량리, 제기동, 안암동 등을 순환하면서 땔감을 직접 팔곤 하였다. 땔감 한 짐을 서울에 내다 팔면 쌀 한 되 정도를 구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땔감 이외에 갈매동 주민들은 볏짚으로 만든 새끼를 서울의 시장에 팔아 생계를 이어 갔다. 새끼는 보통 12~20바리 정도를 꼬아 등에 지거나 혹은 쇠짐 수레에 실은 다음, 사람이 직접 끌거나 우마차로 실어 내다 팔았다. 많을 때는 40바리 정도를 내다 팔았다. 새끼를 꼬는 데는 1920년대 대판식, 산정식이라는 기계를 이용하였다. 이렇게 생산한 새끼는 공출이 심했기 때문에 대부분 몰래 내다 팔았다. 전통 시대 갈매동 주민들은 농사에 사용할 소도 서울에 가서 구입하여 왔다. 대개 동대문 소장과 덕소, 마석 우장을 이용했다. 소는 15~20개월이 지나야 부릴 수 있었는데 3~4개월 된 송아지를 구입하여 와서 기르기도 하였다. 소를 살 때는 반듯하게 걷는 소를 먼저 골랐으며 눈이 벌거면 위험한 소로 간주하여 기피했다.
[농업을 기반으로 한 전통시대 갈매마을 주민들의 삶]
전통 시대 갈매동 주민들 대부분은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였다. 오늘날에는 농업을 별 볼일 없는 것으로 치부하지만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농사는 무척 중요한 생계 수단이었다. 농사를 짓는 관계로 갈매동에는 쌀이 많았다. 구리 지역에서는 "벌말이나 돌섬으로 시집을 가면 조와 수수밥을 먹고, 갈매동 쪽으로 가면 쌀밥을 얻어먹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는 "동대문 밖에서 쌀밥 먹는 마을은 갈매동밖에 없었다."는 말도 있다. 실제로 갈매동은 구리 지역에서 손꼽히는 부촌(富村)이었다. 농사를 크게 짓다 보니 다른 지역에 비해 대지주도 많았다. 마을에 오랫동안 거주한 문화 류씨 집안의 류진갑 씨는 일대에서 이름난 대지주였다. 오늘날 갈매 2리에 해당되는 장기리와 담터 마을의 경우만 하더라도 논이 약 10분의 8을 차지하며 근처에 여러 개의 보[상보·중보·하보·딸기보·덩클보]가 있었다.
전통 시대 갈매동 주민들은 정월 농한기에는 농사지을 준비를 하고 거름을 준비해 둔다. 2월이 되면 봄보리를 파종하고 보리밟기를 한다. 3월에는 못자리를 준비하는데 땅을 파고 인분 또는 재를 뿌린다. 4월경에는 논에 물이 있으면 가래질과 써레질을 한다. 5월과 6월 초순에는 모를 심는데 반드시 하지[양력 6월 21일경] 안에 심어야 했다. 모내고 20~30일 후 호미로 애벌매기를 하고, 10일 후 손으로 두벌 김매기를 한 뒤 벼가 패고 떨어질 무렵 피사리를 한다. 갈매동에서는 이를 삼동이라 부른다. 9~10월경에 벼를 베는데 물이 빠지는 논은 베어서 널고 안 빠지는 논은 벼를 묶어 방죽에 세워 말린다. 중간에 한 번 뒤집는데 말리는 데에만 일주일 정도 걸린다. 그렇다고 갈매동 주민들이 논농사에만 전념한 것은 아니다. 보리와 밀도 심었고 참깨와 콩 등의 밭작물도 재배하였다. 장기리와 담터 마을에서는 5월에 면화를 심고 가을에 거두어 씨를 뺀 다음 솜을 만들어 이불과 옷을 해 입었다.
전통 시대의 갈매동 주민들의 삶은 이러한 생업 환경에 기인했음이 분명하다. 무엇보다 논농사는 가족 혹은 개인의 힘으로만 지을 수 없다 보니 자연스레 농업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 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농사를 짓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의 노동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전통 시대의 품앗이와 두레가 공동체 문화의 모습을 잘 보여 주는데, 갈매동 역시 이러한 공동체 문화가 근래까지 이어져 왔다. 두레의 경우는 1950~1960년대에 오면서 사라졌으나 품앗이의 경우는 최근까지도 남아 있었다. 대개 5~6명 혹은 10명 내외로 무리를 지어 모내기부터 김매기, 추수, 타작 등을 함께하였다. 품앗이는 두레의 경우와 달리 농기(農旗)는 없었지만 풍물을 치며 놀기도 하였다. 풍물패에는 호적도 있었다고 한다. 품앗이를 하는 과정에서 점심과 참은 주인집에서 차리는데, 참으로는 감자와 보리밥, 그리고 막걸리가 나왔다. 삯은 모든 일이 끝나고 2~3일 후에 계산한다.
갈매동 주민들의 공동체적인 삶은 다양한 풍속에서도 엿볼 수 있다. 시대가 변화면서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지만 전통 시대에는 공동체적인 삶을 무척 중요하게 여겼다. 비록 한 개인 혹은 집안의 일이지만 갈매동 주민들은 자기 일처럼 생각하고 희로애락을 늘 함께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아이의 출산과 관련된 백일치레와 돌잔치이다. 아이가 태어나서 백일 뒤에 행하는 백일치레, 그리고 1년이 지나고 행하는 돌잔치에는 이웃 주민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하거나 직접 만든 떡을 돌렸다. 초대를 받거나 떡을 받은 집에서는 아이를 위해 조그마한 선물을 준비한다. 그리고 돌떡을 받은 집에서는 빈 접시를 보내지 않고 접시 위에 돈을 얹어 보내기도 하였다.
마을에 초상이 난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갈매동에는 과거 상여계 혹은 상조회 등으로 불리는 조직이 있어 회원들을 중심으로 의례를 행할 수 있었다. 음식을 준비하는 일부터 상여를 꾸미는 일, 그리고 매장하는 일 등을 모두 자기 일처럼 도왔다. 그리고 출상을 하기 전날이면 선소리꾼과 상여꾼들이 초상집 마당에 모여 상여놀이를 하였다. 지금은 거의 볼 수 없는 풍경이지만 이러한 것들을 통해 마을 주민들이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었음을 엿볼 수 있다. 갈매동을 대표하는 도당굿 역시 이러한 토대 위에서 생겨났을 것이라 짐작한다.
[공동체 삶의 정수(精髓), 갈매동 도당굿]
갈매동이 다른 지역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마을 주민들이 함께 지내는 갈매동 도당굿의 역할이 크다. 갈매동 도당굿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경기도 지역을 대표하는 마을굿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 가치를 인정받아 경기도 무형 문화재 제15호[1995년 8월 10일 지정]로도 지정되었다. 갈매동 도당굿은 격년으로 진행되며, 음력 2월 한 달간 준비를 해서 3월 초순에 지낸다. 모시는 신은 구릉산[검암산] 산신인데, 마을 뒤쪽에 당집이 있다. 당집은 정면 1칸, 측면 2칸짜리 목조 기와집인데, 붉은색을 칠한 대문이 굿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늘 닫혀 있다. 당집의 상량문에는 소화 11년[1935]이라고 되어 있어 이때 개축한 것으로 추측된다.
갈매동 도당굿은 마을굿이기 때문에 주민들 간의 단합이 무척 중요하다. 제의를 준비하고 마치는 일련의 과정은 주민들의 합의와 도움 없이는 진행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도당굿이 열리기 한 달 전에 회의를 통해 제의를 주도적으로 이끌 사람들을 뽑는다. 뽑힌 사람들은 초상이나 험한 일을 피하고, 가급적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다. 제의를 주도하는 이들에 비해 약하긴 하나 주민들 역시 몸가짐에 신경을 쓴다. 제의를 진행하는 데 필요한 비용은 가구당 일정한 액수를 갹출한다. 예전에는 주로 쌀을 걷었으나 현재는 쌀과 돈을 함께 낸다. 갹출이 시작되면 누구나 동참을 하는데, 1994년에는 호구당 4만 원씩을 걷기로 했다. 물론 생활 여건에 따라 1만 원을 내는 사람도 있고 10만 원을 내는 사람도 있다. 고향을 떠나 외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제일 당일에 찾아와 소지를 올린다.
제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당집 청소 역시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진행한다. 음력 2월 10일과 20일, 그리고 맨 마지막 날에 마을 남자들이 주동이 되어 벌초, 당집 소제, 제기 정리, 굿청 만들기, 치성터 다지기 등을 한다. 모든 제의를 마치고 행하는 음복 역시 마찬가지이다. 음복은 대개 제의 과정에서 준비한 여러 가지 음식을 주민들끼리 나눠 먹는 행사이다. 지금은 흔히 볼 수 없지만 예전에는 음복의 하나로 남은 제물을 각 가정마다 똑같이 나누어 보냈다.
갈매동 주민들이 도당굿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이유는 도당굿이 오랫동안 마을 주민들의 신앙처 역할을 해 왔기 때문이다. 슬픈 일이 있거나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당집에 모신 도당 할아버지와 도당 할머니에게 고했으며, 제의가 있을 때면 마을의 안녕을 빌고 모든 사람들의 소원 성취를 기원하였다. 단순히 마을에 모셔진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도당굿을 통해 주민들 사이의 유대감이 더욱 강화되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주민들 간의 단합심이 없었더라면 갈매동 도당굿은 전승이 단절되었을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역량만으로 도당굿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도당굿에 대한 주민들의 신앙심 또한 절대적이다. 일부 이주민들을 중심으로 마을에 기독교 등의 신교(新敎)가 유입되긴 하였으나,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도당굿에 참여하지 않는 건 아니다. 마을굿이 있을 때면 종교를 떠나 대부분의 주민들이 참여를 한다. 실제로 갈매동 주민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도당굿에 대한 신앙심과 자부심이 상당한 편이며 전승 의지 또한 강하다.
[갈매마을의 흥망성쇠 그리고 미래]
갈매동의 정확한 역사는 알기 어려우나 갈매 1리의 경우는 일제 강점기에 100여 호가 살았으며, 해방 후에는 150호가 조금 넘었다고 한다. 1990년대 중반에도 갈매 1리 마을은 400호가 조금 넘었다. 구리시로 승격되는 과정에서 많은 수의 외지인들이 구리 지역에 유입되었지만 갈매동의 인구수는 증가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갈매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변화 속도는 더딘 편에 속한다. 다시 말해서 도시화가 비교적 늦게 진행되었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갈매동의 역사는 기차역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일제 강점기인 1939년에 경춘 철도가 개통되면서 생겨난 갈매역은 일반적인 역전(驛前)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다른 역전에 비해 사람들의 왕래가 없었다는 것이다. 한국 전쟁 무렵 퇴계원의 보급 부대에 필요한 군수 물자를 하역하기 위해 기차가 자주 선 적은 있으나 간이역의 모습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1974년 8월 15일에 폐지되었다가 2010년 12월 21일 경춘선 복선 전철화로 영업을 재개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갈매동의 더딘 발전은 무엇보다 1970년대 초반부터 개발 제한 구역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개발 제한 구역[문화재 보호 구역]으로의 지정은 갈매동 주민들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환경을 보호하는 등의 장점이 있긴 하나 주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생활하는 데 애로 사항이 많았다. 1990년대 중반 넘어 인구수가 늘어나 학교를 증축해야 할 때도 제약이 있었고, 집이나 축사를 지을 때도 무척 까다로웠다. 개발이 묶여 있어 다른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생활 편의 시설도 전무하였다. 오랜 기간 제한 구역으로 묶여 있던 탓에 마을 주민들은 비닐하우스 채소 농사나 과수원을 경영하고 있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벼농사보다는 수익성이 높은 근교 농업으로 전화한 것이다.
갈매동은 서울시 중랑구 신내동과 접경 지역인 연유로 입지적으로 볼 때 여러 가지 장점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퇴계원으로 빠지는 47호선 국도변에 자리하고 있으며, 몇 차례의 폐지와 증설을 거쳐 생긴 갈매역도 있어 도시로서의 발전 가능성이 큰 곳이다. 실제로 개발 제한 구역에서 벗어난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갈매동의 도시화는 급물살을 타게 된다. 지금은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데, 공사가 마무리되는 2016년에는 4,500여 세대, 2017년에는 2,300여 세대가 입주를 할 예정이다. 입주가 완료되면 서울과 가장 근접한 동북부 대단지 타운을 형성할 것으로 전망된다. 공사 중인 갈매 지구 내에는 역사 공원, 수변 공원, 어린이 공원, 수변 공원 내 저류지 3개소를 설치할 계획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