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80020 |
---|---|
영어공식명칭 | People in Dolseom Embracing Hangang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서종원 |
[정의]
경기도 구리시 돌섬마을 주민들의 삶과 한강 개발로 인한 마을의 변화 이야기.
[한강이 구리 주민들의 삶에 미친 영향]
구리 주민들의 삶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주목해 볼 부분이 바로 한강이다. 절대적이라 표현하긴 어렵지만 한강은 구리 주민들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원이다. 봄과 가을에 열리는 구리 유채꽃 축제와 구리 코스모스 축제가 한강 변에서 개최되는 것만 보더라도 한강이 구리 주민들에게 주는 선물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남쪽으로 한강과 접하고 있는 구리 지역은 일찍부터 수운을 활용할 수 있는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져 내려오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고 한양에서 광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는 광진 역시 구리 바로 밑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입지적 특성으로 내륙 수로를 이용해 서울은 물론 강원도·충청도와도 교류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한강과 인접하고 있는 지리적 여건이 반드시 좋은 건만은 아니었다. 다른 지역보다 평야가 발달하지 못했고 한강과 왕숙천 등의 범람으로 농사를 짓는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지금이야 제방 시설이 잘 갖춰져 문제될 것이 없지만 일제 강점기와 1960~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하천의 제방이 잘 조성되어 있지 않아 비가 조금만 와도 강물이 범람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특히 물난리가 심했던 을축년[1925년]에 피해가 컸는데, 최촌 마을을 비롯해 베틀 고개 밑에까지 물이 들어와 마을이 잠겼다고 한다. 아래의 두 자료를 통해 범람으로 인한 구리 지역의 피해 사례를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다. 각각의 자료는 1926년과 1954년도의 모습을 기록한 것이다.
『동아 일보』 1926년 8월 6일 기사 내용이다. "사일 오후 네 시 십오 분에 양주군 미금면 수석리 한강 연안의 수위는 이십오 척 구 촌에 달하여 양경 가도(楊京街道)는 침수와 사태[山崩]로 교통이 두절되었으며 동군 구리면 중랑천의 교량은 삼일 오후 여섯시에 교상 침수가 사 척에 달하고 수뎐 침수가 이십 정보 매몰이 이뎡(二丁) 데방경괴가 오 개소에 연당이 일백오십 간이요 도로 파괴가 이 개소에 연당이 이십 간이며 광적면은 침수 가옥이 이십호수뎐 침수가 이십 뎡보 매몰이 삼뎡(三丁) 도로 파괴가 십 간이요 도로류실이 오 간이더라."
『경향 신문』 1954년 8월 5일 기사 내용이다. "양주, 계속되는 장마로 인하여 지난 이일 현재 양주군 구리면 일대의 전답이 유실 또는 매몰당하여 육개 이주민이 약 1200호에 해당하는 팔천여 명의 농민은 농토를 상실하여 당국에 화급한 대책을 요망하고 있다."
척박한 환경에서 구리 주민들은 벼농사가 아닌 밭작물 재배와 같이 다른 생업 활동에 관심을 가졌다. 아천동의 아치울 주민들은 일찍부터 보리를 비롯해 조와 수수 등을 재배하며 생활하였다. 그리고 한강 변에 인접한 토평동 주민들은 한강이 얼면 얼음을 만들어 내다 팔았다. 지금이야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으나 19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강이 얼 때쯤 톱밥과 왕겨를 섞어 깔고 얼음을 만들어 놓은 다음 흙을 덮어 놓았다가 얼음 장수들에게 판매를 하였다.
우미내 마을 앞으로는 장삿배들이 많이 다녔다. 바람을 이용하여 돛대를 단 배는 동풍이 불면 내려가고 서풍이 불면 올라가는 식이었다. 그래서 우미내 마을에는 과거 목상들이 많았다고 한다. 영월, 정선, 단양, 춘천 등지의 사람들이 이른 가을이면 우미내 마을 목상들에게 '뱃돈’'을 받아 봄에 뗏목으로 나무를 띄워 장사를 하였다.
[섬 아닌 섬에 거주하는 돌섬 주민들의 삶]
한강 변에 인접한 지역이 많지만 구리 지역에서 토평동 돌섬마을처럼 한강을 품고 있는 지역은 찾아보기 어렵다. 품고 있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사방으로 한강물이 흐르는 자그마한 마을인데, 특히 비가 많이 내려 한강이 범람할 정도가 되면 벌말과 돌섬 사이의 샛강이 넘쳐 섬으로 변한다. 돌섬마을은 한강으로 흘러드는 '왕숙천(王宿川)'의 영향으로 생겨났다. 경기도 포천시 내촌면(內村面) 신팔리(薪八里) 수원산(水源山) 계곡에서 발원하여 남서쪽으로 흘러 남양주시를 지나 구리시에서 한강으로 흘러드는 '왕숙천(王宿川)'의 범람원[하천의 하류 지역에서 하천의 범람으로 운반 물질이 하천 양안에 퇴적되어 형성된 평탄 지형]이 바로 돌섬마을이다. 본래 미음면에 속하였으나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법정동 토평동에 속하여 구리면 관할이 되었다. 이 당시 조선 총독부에서 발행한 지도에는 '석도(石島)'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름 그대로 돌이 많은 섬이어서 붙여진 명칭이다.
돌섬마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한두 사람이 마을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마을이 된 것으로 보인다.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의 주요 성씨는 안씨와 서씨이다. 처음 마을에 들어온 사람들은 물난리를 피하기 위해 주변 둘레에 제방 쌓는 일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쌓아 놓은 제방으로 범람하는 물을 막지 못할 때도 종종 있었다. 오랫동안 돌섬마을에 거주한 주민들은 내리는 비와 불어나는 물의 양을 보고 어느 정도 범람할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강물이 범람하여 마을이 잠기자 시에서 마을까지 헬리콥터를 보낸 적도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몇 가지 살림과 옷가지를 챙겨 헬리콥터에 몸을 싣고 구리 체육관으로 피해 그곳에서 강물이 줄어들기만을 기다렸다고 한다.
돌섬마을 주민들의 고달픈 삶은 이뿐만이 아니다. 섬이 아닌 섬에 살고 있기 때문에 육지로 나오기 위해서는 벌말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벌말과 돌섬마을의 거리는 무척 가깝지만 강물이 불어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두 마을 사이에 놓인 다리를 건너기도 하고, 배를 이용해 다니기도 하였다. 하지만 배를 이용해 다닌 적은 거의 없다. 가을이면 마을 주민들이 나무를 이용해 다리를 설치하는데, 주로 이 다리를 통해 외부와 소통하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섶다리 형태이다. 하지만 장마철에는 섶다리를 이용할 수가 없다. 장마철에 물이 불어나 가을에 설치했던 다리가 떠내려가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장마철에는 외부로 나가기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주민들은 장마로 잃은 섶다리를 가을에 보수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새로 다리를 만들었다. 척박한 환경을 이겨 내고자 돌섬마을 주민들은 마을 중앙에 축대를 쌓고 나무를 심어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다.
강물로 인해 내려온 돌이 쌓여 생겨난 돌섬마을은 벼농사를 짓기에 부적합하다. 그런 탓에 주민들 대부분은 밭을 일궈 수수와 조, 보리 등을 재배하며 생활하였다. 주민들의 주요 재배 작물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가 있었다. 한국 전쟁 무렵에는 무와 배추를 대량으로 심어, 인근의 군부대에 납품하였다. 이 무렵 참외 농사도 많이 했다. 당시 재배하던 참외는 일반적인 참외와 달리 속이 빨간 감참외였다. 감참외를 수확해 서울에다 내다 팔았는데, 인접한 벌말 주민들 역시 참외를 재배하여 적지 않은 수익을 올렸다고 한다. 땅콩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재배 작물이다. 땅콩을 재배하기 좋은 모래땅이 많아 비교적 농사가 잘되었다. 당시 땅콩 농사는 김원기라는 마을 사람이 주로 재배를 했다. 김원기는 땅콩 공장까지 세워 수확한 땅콩을 포장해서 판매하였다. 이렇듯 주민들 대부분이 땅을 일구며 생활하였다. 특이한 사실은 주변에 강이 있음에도 물고기를 잡으며 생활하던 어부는 없었다고 한다.
한편, 지리적으로 접근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돌섬마을에는 일찍부터 교회가 생겨났다. 박명섭[구리 문화원 향토사 연구소] 소장은 구리 지역에서 교회가 제일 먼저 생긴 곳이 돌섬마을이었다는 말을 해 주었다. 교회의 명칭은 토평 교회이며, 박명섭 소장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인 1956~1957년에 생겼다고 한다. 좋은 지역이 있음에도 척박한 돌섬 마을에 교회가 생겨난 연유는 알기 어렵지만 1970년대 벌말로 옮겨가기 전까지 마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만은 사실이다.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돌섬마을의 상처]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관통하는 한강은 서울 시민은 물론이거니와 경기 도민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원이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을 비롯해 여러 가지 식물들이 서식하고 있고, 계절 따라 철새들이 날아와 시민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특히 늦가을이면 기러기와 청둥오리 등이 무리를 지어 찾아와 한강 일대에서 겨울을 나고 이듬해 봄에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강변 근처에 있는 관계로 의도하지 않게 불미스러운 일을 접하는 경우도 많다. 그중에서도 한강에 빠져 죽은 시신을 자주 목격하는데, 주민들은 그런 일이 있은 뒤로는 한동안 강가를 쳐다보기가 겁이 난다고 한다. 또한 한강 변의 다른 섬들과 마찬가지로 산업화 과정에서 골재 채취 문제로 조용한 날이 없었다. 마을에서 골재 채취를 시작한 것은 정확하지 않지만 한국 전쟁 이후부터라고 한다. 돌섬마을 앞 자갈밭에서 골재 채취가 진행되었는데, 당시에는 두 사람이 한 조를 이뤄 원하는 크기의 자갈을 걸러 내는 망을 설치하여 작업을 하였다. 한 사람이 자갈을 퍼 주면 다른 사람은 자갈을 올려놓은 망을 흔들어 원하는 크기의 자갈을 골라 내었다. 이 작업은 주로 전라도 등에서 온 외지인들이 하였다.
한국 전쟁 당시의 골재 채취는 주민들의 삶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 문제는 1980년대 후반 무렵 중장비 등을 동원하여 진행한 골재 채취였다. 경기도와 계약을 맺은 삼성 종합 건설을 비롯해 한국 중공업·삼표산업 등 굴지의 건설 회사들이 1988년부터 한강 변에서 본격적으로 골재 채취를 하였다. 골재 채취가 시작되면서 돌섬마을 주민들의 삶은 이전에 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변화가 생겼다. 골재 채취를 반대하는 주민들은 관할 부서 등을 찾아가 항의를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골재 채취 등을 반대할 경우에는 행정 기관에서 공탁을 걸어 경작을 금지하는 사례도 있었으며, 포클레인 등의 중장비 기계를 몰고 와 밭에 땅을 파 놓기도 하였다. 돌섬과 함께 당시 골재 채취가 활발하게 진행되던 곳이 바로 하남시에 속해 있는 당정섬이다. 당정섬의 경우는 1990년도 공사 지역으로 결정되면서 농작물 수목의 식재 및 비닐하우스 등에 '공작물 설치를 금함'이 적힌 간판이 세워졌다. 1990년 『한겨레 신문』에는 미사동에 사는 이수철 씨의 인터뷰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이를 통해 골재 채취로 인한 돌섬과 당정섬 마을의 실상을 엿볼 수 있다.
『한겨레 신문』 1990년 6월 28일자 기사에 미사동에서 보트 대여업을 하는 이수철(49) 씨는 "1980년대 들어 구리시 토평동 앞 돌섬과 당정섬 앞 쪽섬도 골재 채취를 위해 모두 파먹더니 사람이 살면서 농사까지 짓고 있는 당정섬마저 없애려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다."며 "강물은 여울과 소를 거쳐 흐르면서 자연적으로 정화되게 마련인데 그동안 여울목을 형성했던 당정섬 일대 수역이 결국 없어지게 됐다."며 분개했다.
무분별한 골재 채취로 여러 섬들이 자취를 감추었을 뿐만 아니라 돌섬마을 등 섬에 살던 주민들은 하나둘씩 마을을 떠났다. 한강 주변에서 서식하는 피라미와 메기, 쏘가리 등을 잡으며 생활하던 주민들에게 골재 채취는 생활의 터전을 떠나게 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강 주변이 깊어지면 이들 어류들이 거의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골재 채취를 반대하던 학자들은 "공장 폐수와 가정 하수가 물고기의 밥에 독약인 격이라면 마구잡이식 골재 채취는 민물고기나 철새들의 집을 없애는 일"[『한겨레 신문』 1990. 7. 1.]이라고 입을 모았다. 골재 채취를 주도했던 집단들은 단순히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골재를 채취했겠지만, 지나친 욕심 때문에 그러한 행위가 주민들의 삶뿐만 아니라 자연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나다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자연친화적 시대의 돌섬마을]
돌섬마을은 구리 지역에서 개발이 가장 늦은 지역 중 하나이다. 거주하는 사람도 많지 않고 한동안 개발 제한 구역으로 묶여 있던 탓에 개발의 바람이 돌섬마을까지 미치지 않았다. 구리시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마을을 접하면 어느 시골 마을에 와 있는 느낌이 든다. 오래된 주택이 많고, 비포장과 폭이 좁은 도로가 대부분이기에 더욱 그러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예전에 비해 다소 개선되긴 했으나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면 주민들은 마을이 물에 잠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다고 한다. 특히 화재 등 재난 상황 발생 시 소방 현장 활동 여건이 열악하다. 이런 현실을 직시한 구리 소방서에서는 2014년에 갈매 마을 80여 세대에 소화기와 주택 방화 점검표 등을 배부하였다. 하지만 환경 문제와 생태계 파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돌섬마을이 지니고 있는 가치가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자연을 접하기 어려운 도시민들, 특히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곤충과 새를 비롯해 자생 식물 등의 동식물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지방 자치 단체들의 노력은 어느 때보다 눈에 띄게 많아졌다. 생태 도시를 외치는 도시가 있는가 하면 시민들이 편하게 자연환경을 접할 수 있는 둘레길 조성은 이러한 시대의 흐름과 맞닿아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돌섬마을을 품고 있는 구리시는 다른 도시에 비해 일찍 이러한 부분에 눈을 떴다. 2008년에 완공된 '왕숙천 생태 공원'은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생태 공원은 구리 시민들에게 생물 또는 자연물을 보다 풍부하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조성된 공원이다. 현재 왕숙천 생태 공원에는 여러 가지 꽃과 잔디, 습지와 분수대 등이 있다.
『국민 일보』 2011년 10월 31일자 기사를 보면 돌섬마을 역시 이러한 시대적 흐름과 일정 부분 궤를 같이하였다. 무엇보다 개발 제한 구역이 해제되면서 이러한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비록 해제되는 과정에서 우여곡절도 많았으나 해제가 된 이후 구리시에서는 돌섬마을을 개발하기 위한 여러 가지 청사진을 모색하고 있다. 2011년 가을에 조성이 완료된 구리시 둘레길 코스 중[왕숙천, 장자못, 한강, 아차산, 동구릉 등 숲과 물길을 연결하는 둘레길 39.4㎞를 조성]의 하나인 동구동 구리역 광장∼장자 호수 공원 코스에 돌섬·벌말 마을이 포함되어 있다. 이 코스를 걷다 보면 하수 처리장, 곤충 생태관, 신재생 에너지 홍보관, 구리 자원 회수 시설과 구리 타워, 왕숙천 일대의 돌섬·벌말 등을 둘러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