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03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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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驛院 |
이칭/별칭 | 역관(驛館),역참(驛站),우역(郵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재관 |
[정의]
경상북도 청송 지역에 설치·운영되었던 조선시대 교통·통신 기관.
[개설]
역원(驛院)에서의 ‘역(驛)’은 전통 시대에 중앙 정부와 지방 간의 효율적인 연결망을 구축하기 위해 설치한 교통·통신 조직의 일종이다. ‘원(院)’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출장하는 관원들을 위해 각 요로(要路)와 인가(人家)가 드문 곳에 둔 국영(國營) 숙식시설이다. 역과 관련되어 원이 설치되므로 보통 역원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청송부(靑松府)와 진보현(眞寶縣)에는 청운역(靑雲驛), 문거역(文居驛), 화목역(和睦驛), 각산역(角山驛), 이전평역(梨田坪驛)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이웃한 고을인 안동의 안기역(安奇驛)을 중심으로 한 역도(驛道)인 안기도(安奇道)에 속해 있었다.
안기도는 중심 역에 찰방(察訪)이 주재하면서 안동을 중심으로 의성-의흥-신령 방면, 안동-청송-흥해 방면, 안동-진보-영해 방면으로 이어지는 역로(驛路)이다. 소속 역은 주로 소로(小路) 또는 소역(小驛)에 속하였으며, 청송과 진보 관내의 역들 또한 여기에 해당하였다. 청운역, 문거역, 화목역, 이전평역은 안동-청송-흥해 방면으로 이어지는 역로에 있었고, 각산역은 안동-진보-영해 방면으로 이어지는 역로에 있었다. 한편, 원으로는 삼자원(三者院), 지원(枝院), 눌인원(訥仁院), 보시원(普施院), 보현원(普賢院), 추현원(楸峴院), 삼두등원(三豆等院) 등이 있었다.
[관련 기록]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청송부읍지(靑松府邑誌)』, 『진보현읍지(眞寶縣邑誌)』,『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경상좌도청송부읍지(慶尙左道靑松府邑誌)』,『영남읍지(嶺南邑誌)』,『영남역지(嶺南驛誌)』,『청기지(靑己誌)』 등의 지리지나 읍지의 역원조(驛院條)에 역원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다만 역은 조선 후기까지 운영되었기에 그 위치나 다른 역과의 이격거리, 보유한 역리(驛吏), 역노비(驛奴婢), 마필(馬匹) 등의 기록이 남아 있지만, 원은 조선 후기에 대부분 그 기능을 상실하고 주점이나 주막으로 전락하면서 위치 정도만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1937년 간행된『청기지(靑己誌)』에 기록된 청송도호부(靑松都護府)와 진보현 소재 역의 위치나 다른 역과의 이격거리, 보유한 역리, 역노비, 마필에 관한 자료와 『영남역지(嶺南驛誌)』에 기록된 위전답(位田畓) 자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청운역은 청송부 남쪽으로 10리[약 4㎞], 남쪽으로 문거역과 40리[약 16㎞], 동쪽으로 이전평역과 40리, 서쪽으로 안동 금소역(琴韶驛)과 60리[약 24㎞], 북쪽으로 각산역과 40리의 거리를 두고 있다. 중마(中馬) 2필, 복마(卜馬) 5필, 역리 400인, 역노 51인, 역비 49인을 보유하였다. 위전답은 33결(結) 72부(負) 3속(束), 내(內) 15결, 진천복호(陳川復戶) 48부 9속이 있었다.
문거역은 청송부 남쪽 50리[약 20㎞], 서쪽으로 화목역과 30리[약 12㎞], 북쪽으로 청운역과 40리, 동쪽으로 이전평역과 50리, 남쪽으로 경주 인비역(仁庇驛)과 60리의 거리를 두고 있다. 중마 2필, 복마 5필, 역리 220인, 역노 16인, 역비 30인을 보유하였다. 위전답은 31결, 내 2결 81부, 진천복호 15결 65부가 있었다.
화목역은 청송부 남쪽 70리[약 28㎞], 동쪽으로 문거역과 30리, 서쪽으로 의성 청로역(靑路驛)과 40리의 거리를 두고 있다. 중마 2필, 복마 5필, 역리 315인, 역노 8인, 역비 3인을 보유하였다. 위전답은 39결 13부 2속, 내 14결, 진천복호 15결 15부 3속이 있었다.
각산역은 진보현 동쪽 5리[약 2㎞], 청운역과 40리의 거리를 두고 있다. 역리, 역노비, 마필 등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며,『영남역지』에 중등마(中等馬) 2필이 기록되어 있다. 위전답은 43결, 내 6결 9부 6속, 진천복호 61결 90부가 있었다.
이전평역은 청송부 동쪽 40리, 북쪽으로 청운역과 40리, 서쪽으로 문거역과 50리, 동쪽으로 영덕 남역(南驛)과 40리, 남쪽으로 청하 송라역(松羅驛)과 70리의 거리를 두고 있다. 중마 2필, 역리 202인, 역노 1인, 역비 1인을 보유하였다. 위전답은 7결 24부 2속, 내 35부, 진천복호 20결 60부가 있었다.
[청송 지역의 역]
청운역은 청송군청에서 포항시 방면으로 국도31호선을 따라 약 5㎞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인 청송읍 청운리에 있던 역으로, 지금은 마을 이름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을 뿐 역으로서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청운역은 일제에 항거하여 일어난 청송의진(靑松義陣)의 주둔처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청운역 앞의 넓은 백사장은 의병들이 진법을 익히고 화승총의 사격 연습 등을 하였던 장소로 사용되었다.
문거역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촌 지역인 안덕면 문거리에 있던 역으로, 마을 이름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을 뿐 역으로서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문거역은 청송에서 내려오다 흥해와 경주로 큰 길이 나누어지는 삼거리 지점에 있었다. 문거역과 관련해서는 일제에 항거하여 일어난 청송의진이 감은리전투(甘隱里戰鬪)를 앞두고 주둔하였던 활동지의 한곳으로서 알려져 있어 독립운동과도 연관된 유서깊은 장소이기도 하다.
화목역은 현서면 화목리 원화목(元和睦)에 있던 역이다. 화목역이 위치한 뒤쪽에 화목재(和睦-)가 있는데, 지금은 국가지원지방도68호선이 지나가는 도로이나 예전에는 신령, 의흥으로 가는 큰 길로서 기능하였다. 화목역은 여기에 걸맞는 역으로서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각산역은 조선시대 진보현에 있던 유일한 역으로, 진보에서 평해로 이어지는 길가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금은 진보면 각산리의 마을 이름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을 뿐 옛터는 찾아볼 수 없다. 이전평역은 조선 후기인 1711년(숙종 37)에 설립된 역으로, 과거에는 안덕을 지나 영덕으로 넘어가는 길가에 있었으며, 지금의 주왕산면 주산지리 일대이다. 역의 옛터는 알 수 없으며, 다만 마을 이름에 그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다. 마을 옆으로 지방도914호선이 있어 역을 경유했던 옛길의 흔적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청송 지역의 원]
삼자원은 조선시대 청송부 관할에 있던 원의 하나로, 부남면과 현동면 사이에 있는 고개인 삼자현(三者峴)의 아래에 있어 고개를 넘는 사람들을 위해 숙식을 제공하는 장소였다. 삼자현에는 예전에 청송에서 포항 죽장[당시에는 경주부 관할]으로 가는 큰 길이 있었으며, 현재는 국도31호선이 개설되어 있다.『여지도서』에 역이 폐지된 기록이 보이며, 그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지원은 조선시대 청송부 관할에 있던 원의 하나로, 부의 서쪽 13리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청송에서 안동으로 넘어가는 사이에 있는 고개인 지현(枝峴)을 넘는 사람들을 위해 숙식을 제공하는 장소였다.
눌인원은 조선시대 청송부 관할에 있던 원의 하나로, 청송에서 포항 죽장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인 꼭두방재[복두현(福頭峴)]의 아래에 있어 고개를 넘는 사람들을 위해 숙식을 제공하는 장소였다. 그 위치는 현동면 눌인리로서 마을의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꼭두방재는 국도31호선이 통과하는 고갯길로 활용되고 있다.
보시원은 조선시대 진보현 관할의 원이다. 현재 그 소재지는 알 수 없으나, 현의 동쪽 1리에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읍치 인근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보현원은 조선시대 진보현 관할에 있었던 원의 하나로, 현의 동쪽 20리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진보면 신촌리에 그 터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추현원은 조선시대 진보현 관할에 있던 원의 하나로, 진보면 추현리에 있는 가랫재[추현(楸峴)] 아래에 있는 마을인 원리(院里)에 그 터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랫재는 국도34호선이 통과하는 고개로 옛날에도 안동으로 가는 큰길이 이 고개를 지나갔으며, 고개를 넘는 사람들을 위해 숙식을 제공하는 장소로 추현원이 있었다.
삼두등원은 조선시대 진보현 관할에 있던 원의 하나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진보현 역원조에 현의 동쪽 15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후 발간된 읍지류에서는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원으로 개설된 것은 오래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이른 시기에 그 기능을 잃고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며, 그 위치도 알 수 없다.
[변천]
조선 전기에 정비되어 운영되던 역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으면서 파발제(擺撥制)라는 새로운 통신 방법이 도입되면서 봉수제(烽燧制)와 더불어 차츰 쇠퇴하였다. 개항 이후 1884년(고종 21) 우정국(郵政局)이 들어서고, 1887년(고종 24) 근대적 통신제도인 우사(郵舍)가 각 역을 중심으로 신설되면서 기능을 잃고 갑오개혁(甲午改革) 때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청송의 역들 또한 이러한 변화에 따라 폐지되고 사라지게 되었다.
한편, 공무 여행자의 숙식을 위해서 각 요로에 설치한 원은 조선 전기까지는 많이 활용되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점차 본래의 기능을 잃고 대부분 폐지되었으며, 주막이나 주점 등으로 전락하거나 사라지게 되었다. 청송의 원들 또한 그러한 운명을 피하지 못하고 사라졌으며, 그 터마저 정확하게 알 수 없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시대 청송 지역에는 교통·숙박 시설로서 5곳의 역과 7곳의 원이 설치되어 운영되었으며, 각각 그 생성과 소멸 시기, 위치 등에 대한 조사·연구가 필요하다. 이러한 역원의 존재는 전통 시대 지역의 교통체계 이해와 향토사 연구 등에 활용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