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8014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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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救國-魂-, 靑松義兵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청송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대웅 |
[개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으로 전국 각처에서 일본의 조선 침략 야욕을 타도하기 위한 의병들의 창의가 일어났다. 청송 지역에서도 의진들이 결성되어 1896년 3월 결성된 청송의진과 진보의진, 그리고 을사늑약 이후 경상북도 영천에서 결성된 산남의진에 참여한 청송 출신의 의병 및 1908년 2월경부터 청송 지역에서 의병장 서종락(徐鍾洛)이 지휘하던 청송 동부진과 의병장 남석구(南錫球)가 지휘하던 청송 서부진이 유격전 등 항일 투쟁을 벌였다.
이처럼 청송인들은 당시의 정치와 사회, 그리고 지역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치열한 항전을 전개하였다. 개항기 1896년부터 대한제국기 1910년경까지 경상북도 청송군에서 전개된 의병 투쟁을 통해 청송인들의 국난극복을 위한 구국의 정신을 살펴보았다.
[유생들 향교에 모이다]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18일]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시해된 을미사변과 11월 15일[양력 12월 30일] 단발령의 공포로 격화된 반일의식으로 유생들은 반침략 반개화를 기치로 걸고 의병을 일으켰다. 경상도 지방의 유림에서도 1896년 1월 안동을 비롯하여 각처의 유생들이 창의하였다. 충의와 절개의 고장 청송에도 각처에서 창의하고 있던 의병의 봉기 소식이 전해졌다.
1896년 3월 8일에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유시연(柳時淵)이 포수 20여 명을 대동하고 청송으로 들어와 청송군 관아의 무기고를 열고 병기를 탈취하려 하였다. 그리고 창의를 촉구하는 격문을 청송유림들에게 보냈다. 이에 고무된 청송유림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창의를 추진하였다. 드디어 3월 12일 청송유림 100여 명이 향회(鄕會)를 개최하여 창의하기로 하였고, 이날 오후 객사(客舍)에서 소류(小流) 심성지(沈誠之)를 창의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청송유림은 퇴계 이황을 종장으로 한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정재학파(定齋學派)와 서인(西人)의 학풍을 계승한 인물들이 주축을 형성하고 있었다. 청송 지역에서 정재학파를 계승한 유생은 서효원(徐孝源)을 비롯하여 심태지(沈泰之)·심응규(沈應奎)·신진운(申晉運)·이응협(李應協)·서병화(徐炳華)·남석영(南錫永)·남수명(南守明)·권오규(權五奎)·심응지(沈應之) 등이 있었다. 김흥락(金興洛)의 문인은 권상술(權商述)·조성태(趙性台)·신상극(申相極)·김진성(金鎭聲) 등이며, 김도화(金道和)의 문인은 서석화(徐錫華)·조성태·이상일(李相日) 등이다.
그중에서 서효원은 청송 지역을 대표하는 정재학파의 일원으로 청송지역의 학풍을 주도하였으며, 그 문인은 서효신(徐孝信)·서효격(徐孝格)·서효달(徐孝達)·김숭진(金崧鎭) 등이 있었다. 한편, 서인의 학풍을 계승하고 있는 심성지는 서인에서 노론으로 이어지는 청송심씨 가문의 성리학적 전통을 계승하여 심능규(沈能奎)·장병두(蔣柄斗)·심의춘(沈宜春) 등의 제자를 양성하며 청송지역에서 독자적인 서인의 학풍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청송 지역의 학문적 경향이 19세기 후반 외세침략에 대응한 위정척사운동의 주류를 형성하였고, 1896년 3월 창의하는 청송의진에서도 반영되었다.
[청송의진, 창의의 깃발을 세우다]
1. 부대 조직
심성지는 1896년 3월 12일 창의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이어서 3월 15일 부장 조성박(趙性璞), 우익장 권성하(權成夏), 좌익장 김상길(金相吉)이 내정되었고, 참모와 서기 이하가 선발되었다. 3월 16일 대장기(大將旗)를 세우고, 3월 17일 축문(祝文)과 창서사(唱誓辭)를 낭독하며 천신과 지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3월 22일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원을 의영도지휘사(義營都指揮使)로 임명하여 진용을 갖추었다. 4월 6일과 4월 29일 청송의진은 의병 활동 과정에서 군비의 효율적인 모집과 운용을 위해 크게 두 차례에 걸쳐 지휘부의 편제를 정비하였다. 특히 4월 29일에는 참모 신동호(申東鎬)가 주도하여 각 부대를 창의장 중심으로 재편성하여 상영(上營)[총영(摠營) 혹은 내영(內營)]과 그 아래 각영(各營)으로 편제를 정비하였다.
이에 따라 1896년 4월 29일까지 청송의진은 대장 심성지, 부장 조성박, 참모 남승철(南昇喆)·김대락·이채구(李采久)·오세로(吳世魯), 서기 김숭진·심의식(沈宜植)·장달식(蔣達植)·조성태·심의택(沈義澤)·남상현(南相鉉), 종사 신익한(申翊漢)·이의수(李宜洙)·조능호(趙能祜)·장풍호(蔣豊鎬), 중군 김대락, 좌익장 김상길, 우익장 남두희, 전방장 윤정우(尹楨禹), 우방장 윤관실(尹寬實), 후방장 장무호(蔣武鎬), 사병도총 남승철, 장재도총 심의화(沈宜華), 진무 정진도(鄭鎭燾), 소모장 서효신·심능장(沈能璋), 선봉장 홍병태(洪秉泰), 의영도지휘사 서효원, 지휘사 심규(沈硅)·조규락(趙奎洛), 군문도집사 윤경신(尹景信), 군문집사 박봉의(朴鳳儀), 집사 윤경승(尹景昇), 모량도감 김진만(金鎭萬), 자제군관 심능찬(沈能璨), 군사 이경식(李景植), 향도청 조성눌(趙性訥)·심능열(沈能說), 척후 임영규(林永圭)·장달식·김상익(金相益)·조성효(趙性斅) 체제로 편제되었다.
2. 부대를 각 면으로 분산
청송의진은 5월 24일 국왕 고종의 해산 칙유문(勅諭文)을 받고, 5월 25일 청송군 관내 8개면으로 분진(分陣)을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부장 조성박을 현내(縣內), 사병도총 남승철을 현동(縣東)과 현남(縣南), 중군 김대락은 현북면(縣北), 선봉장 홍병태를 현서면(縣西面)의 외방장에 임명하였고, 우익장 서효신을 부동(府東), 좌익장 권성하를 부내(府內), 소모장 심능장을 부서면(府西面) 등의 외방장에 임명하여 의병진을 면군체제(面軍體制)로 전환하였다.
면군체제하에서 외방장은 친군(親軍)을 거느리고 각 면의 면임(面任)과 집강(執綱)의 협조하에 그 지역의 장정으로 대오를 편성하였다. 외방장은 이속과 서기 각각 1인을 거느리고, 의병 본진의 외각부대로서 정보수집, 지역방어, 본진후원 등의 군사적 활동을 벌였다. 이리하여 청송군의 각 면 행정은 외방장을 중심으로 한 청송의진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청송의진 창의 초기에 이미 군수 남유희(南有熙)가 도망한 상태에서 이교(吏校)[서리와 장교]들도 창의에 다수 참여하였기 때문에 청송군의 행정조직도 의병진이 장악하였다. 즉 『적원일기(赤猿日記)』에 따르면 향리들도 의연금을 납부하는 등 의병진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외방장은 면임과 집강의 협조하에 도적을 방비하는 등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다.
[흥해와 영덕에 군사를 보내다.]
1. 흥해출진소
창의 초기부터 청송의진은 흥해의진·영덕의진과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일이 있으면 서로 돕는다.”는 약속을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청송의진은 경주지역으로 참모 홍병태를 소모장으로 파견하여 활동하고 있었으며, 홍병태는 김하락의 이천의진(利川義陣)이 흥해로 진출하자 함께 흥해로 나아갔다. 5월 9일 청송의진은 군사를 소모하기 위해 도총 남승철, 선봉 홍병태(洪炳泰), 우방장 윤정우 등이 이끄는 포정 4초(哨) 약 70명을 흥해로 파견하였다. 이른바 흥해출진소이다.
흥해출진소는 흥해 지역에서 소모활동을 벌이는 한편, 관군에 대응하여 본부로 첩보를 보내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청송의진은 5월 25일 본진을 해산하고 군내 8면으로 분진하였다. 흥해출진소는 영덕출진소와 함께 6월 28일 영덕으로 진출한 김하락의 이천의진과 합세하였다. 그뒤 흥해의진·영덕의진·영해의진·안동의진과 연합하여 7월 14일 영덕전투에 참여하였다. 이 전투에서 흥해출진소의 소모장 홍병태가 전사하였다. 이와 같이 청송의진은 흥해와 영덕의 출진소를 단위로 경주·흥해·영덕 등지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였다.
2. 영덕출진소
1896년 5월 14일 감은리전투(甘隱里戰鬪) 소식을 듣게 된 영덕의진이 청송의진을 지원하기 위해 5월 17일 저녁 청송 이전평역(梨田坪驛)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미 상황이 끝났다는 것을 알고 청송의진을 방문한 뒤 돌아갔다. 이때 영덕의진은 군문도지휘 겸 총포장 김노헌(金魯憲), 전방장 심의종(沈宜宗), 후방장 신병렬(申炳烈), 서기 안문익(安文翼) 등이 포군 42명을 이끌고 있었다. 청송의진은 5월 20일과 21일 대구의 관군이 출병하여 영덕으로 진군하고 있다는 사통을 거듭하여 받았다. 이에 청송의진은 우익장 권성하, 후방장 장무호, 참모 조광규(趙光奎), 종사관 심모(沈某), 서기 윤효업(尹孝業) 등을 파송하여 포군 3초를 이끌고 영덕에 가서 후원하도록 하였다. 이른바 영덕출진소이다.
이날 저녁 청송의진의 영덕출진소가 지품(知品)에 도착하였을 때, 이미 영덕의진은 원척(元陟)에서 관군의 공격을 받고 12명의 부상자를 낸 채 도피한 뒤였다. 5월 25일 청송의진은 본진을 해산하고 군내 8면으로 분진하였다. 그러나 청송의진의 영덕출진소는 6월 28일 영덕으로 진출한 김하락의 이천의진과 합세하고, 흥해의진·영덕의진·영해의진·안동의진과 연합하여 7월 14일 영덕전투에 참여하였다. 이와 같이 청송의진은 흥해와 영덕의 출진소를 단위로 경주·흥해·영덕 등지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였다.
[주변 지역의 의병진과 힘을 합치다]
1. 감은리전투
1896년 5월 14일 감은리전투는 3진 연합의 의성연합의진(義城聯合義陣)이 청송군 안덕면 감은리에서 관군을 상대로 벌인 전투이다. 의성연합의진은 관군 170여 명이 대구 방면에서 청송 화목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에 이천의진의 구연영(具然英)은 2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안덕 후방에 잠복하고, 신용희(申龍熙)는 2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안덕 뒤 상봉에, 김경성(金敬誠)은 2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황산(城隍山) 주봉에 각각 매복하였다. 그리고 조성학(趙性學)은 2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황현(城隍峴)에 잠복하고, 김하락은 높은 지대에 올라가 총지휘를 하였다. 한편 김상종이 거느린 의성의진은 앞선 전투의 피로 때문에 관망하며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고, 청송의진은 안덕면 근곡(斤谷)으로 물러나 있었다.
한편, 이날 정오 관군은 의병이 매복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안덕을 지나 성황현까지 행군해 왔다. 이때 의병진에서 천보총(千步銃)으로 일제히 사격을 하자 앞서 들어오던 관군은 곧 흩어져 후퇴하였다. 이어 사방에 매복해 있던 의병들이 일제히 추격하여 관군 10여 명을 사살하였다. 관군은 크게 무너져 앞산을 향하였다. 총을 잘 쏘는 의병 10여 명이 다시 총을 쏘아 관군 수십 명을 죽이니 관군은 모두 사방으로 흩어졌다. 얼마 후 달아났던 관군이 다시 의병진을 공격했으나 김하락은 포를 쏘아 관군을 격퇴하였다.
청송의진의 대장 심성지는 근곡에 머물고, 중군 김대락, 진무 정진도, 참모 오세로, 서기 윤도혁(尹道爀), 외방장 안병룡(安秉龍), 군사 이경식, 집사 윤경승 등은 포정 60여 명을 거느리고 명당동 연안에 도착하여 감은리 뒷산으로 올라가 합류하였다. 청송·이천·의성 세 의진은 계속 적을 추격하여 적병을 10여 명을 죽였다. 이때 날이 어두워졌으므로 마침내 군대를 산 아래로 퇴각시켜 옥현(玉峴)에 유진하였다. 관군들이 감은리에 방화하여 연기와 불길이 하늘에 닿았고 포성은 땅을 진동하여 그 참상을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리하여 연합의진은 회군하여 이천의진 2대와 청송의진은 본진을 파수하고, 모든 의진은 안덕면 문거(文居)로 물러나 유숙하였다. 관군은 형세가 불리함을 깨닫고 의성·신녕 등지로 물러났다.
감은리전투는 관군 10여 명을 사살한 의성연합의진의 승리였다. 그러나 이 전투로 안덕면 감은리는 관군의 방화로 전소되는 참상을 입었다. 청송의진에서는 중군 김대락과 진무 정진도를 감은리로 보내 위무하였으며, 중군 김대락은 군문집사 박봉의로 하여금 이천·의성 양진을 위무하기 위해 네 동이의 술을 내주며 전별하였다. 이천의진과 의성의진은 안덕 신시장에 주둔하며 흩어진 병졸들을 다시 수습하여 전열을 정비한 뒤, 이날 오후 의성으로 회군하여 오촌동(梧村洞)에 유숙하였다. 그리고 청송의진은 관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2. 경주성전투
감은리전투 이후 5월 25일 본진을 해산한 청송의진은 군내 8면으로 진영을 분산하였다. 그리고 6월 15일 경주의진·이천의진·의성의진과 함께 경주연합의진(慶州聯合義陣)을 결성하고 6월 18일 경주성전투에 참여하였다. 경주연합의진을 결성하고 경주성전투에 참여한 홍병태(洪秉泰)는 청송의진의 우익장이었고, 김두병(金斗柄)은 의성의진의 후군장이었다. 그리고 이천의진에서는 대장 김하락을 비롯하여 좌익장 안옥희(安玉熙), 우익장 안재학(安載學), 우선봉 이상태(李相台) 등이 참여하였다. 그 외 이천의진의 조성학은 직책을 맡지 않고 함께 참여하였다.
경주연합의진은 경주지역의 의병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지만, 이천·의성·청송이 참여하였다. 물론 의병장은 대부분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활동하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청송의진과 의성의진의 병사 일부가 참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주연합의진은 6월 17일 경주성을 공략하여, 6월 18일 경주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6월 22일 대구부의 경상감영과 안강 주둔 안동진위대(安東鎭衛隊) 소속의 관군이 연합하여 경주성을 공략하였다. 6월 23일 경주연합의진은 3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경주성을 물러났다.
3. 영덕전투
6월 18일 경주성전투 이후 이천의진의 김하락은 잔여 병력을 이끌고 6월 23일 달성(達城), 6월 24일 기계(杞溪), 6월 25일 흥해 등지를 경유하여 영덕을 향해 진군하였다. 이동하는 과정에서 흩어졌던 병사들이 차츰 합세해 왔다. 흥해·청하에서는 다시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흥해 관아의 무기고를 공격하여 탄약을 조달하는 등 의병진을 정비하였다. 김하락이 일본군 수비대의 추격을 받으며 이동할 때, 6월 28일 흥해와 영덕에 출진소를 설치하고 있던 청송의진이 합세하였다. 그리고 6월 29일 영덕 장사를 거쳐, 7월 2일 영덕읍에 도착하니 영덕의진의 의병장 신운석(申運錫)이 합세하였다.
김하락은 영덕에서 의병 100여 명을 모집하여 진용을 더욱 보강하였다. 7월 5일 김하락은 다시 축산(丑山)으로 이동하였다. 7월 7일 영해의 선봉장과 좌익장이 찾아와 합세할 것을 요청하였으므로 함께 영해부로 들어갔다. 뿐만 아니라 7월 9일 안동의진의 유시연이 6개 부대를 거느리고 와서 합세하였다. 이른바 영덕연합의진(盈德聯合義陣)이다.
김하락은 유시연과 함께 안동부로 진을 옮기기로 하였다. 7월 11일 김하락은 일본군이 청하(淸河)에서 영덕으로 북상하고 있다는 첩보를 받았다. 이에 김하락은 경주의진의 이채구와 이준구, 청송의진의 홍병태로 하여금 군사 100여 명을 이끌고 영덕으로 출병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김하락은 7월 12일 영덕으로 들어갔다. 7월 13일과 14일, 양일간에 걸쳐 김하락의진과 일본군 사이에 접전이 벌어졌다. 첫날 전투에서 김하락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다음 날 수백 명의 일본군과 벌인 남천수전투(南川藪戰鬪)에서 김하락은 군사적인 열세로 말미암아 크게 패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하락은 탄환 2발을 맞고 중상을 입었으며, 청송의진의 홍병태도 전사하고 말았다. 김하락은 “왜놈들에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고기 배 속에 장사를 지내겠다”고 하여 스스로 강물에 투신하여 목숨을 끊었고, 병졸 몇 사람도 김하락의 뒤를 따랐다. 김하락이 이천에서 의병 활동을 시작한 후 약 7개월 만에 의병 활동의 종지부를 찍는 장렬한 순간이었다.
한편 김하락의진이 영덕에서 관군과 격전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 인근에 전해졌다. 이에 김도현 및 안동·영양·선성 등지의 의병들이 영덕으로 이동하였으나 이미 김하락의진은 와해된 후였다. 김하락이 전사한 뒤 지도자를 잃은 잔여 의병은 산발적이나마 일정 기간 의병 활동을 계속하였다.
[최후의 전투를 치르다]
청송의진의 영덕출진소는 6월 28일에는 영덕으로 진출한 김하락의 이천의진과 함께 흥해의진·영덕의진·영해의진·안동의진과 연합하고 1896년 7월 13일과 14일 영덕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이천의진의 김하락과 청송의진의 홍병태가 전사한 뒤 영덕에서 귀환하였다. 청송의진은 7월 20일경 청운역에 진을 쳤다. 영양의 김도현도 영덕에서 가산(佳山)·창수(蒼水)·소산(笤溪) 등지를 거쳐 7월 20일경 상덕천(上德川)으로 들어와 진을 치고 있었다.
한편 김하락이 전사한 뒤 큰 손상을 입은 이천의진은 7월 16일경 청송으로 들어와 화장동(花場洞)에 진을 치고 있던 중 7월 20일경 관군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청송의진은 이천의진을 돕기 위해 청운에서 화장으로 행군하여 나아가던 중 마평(馬坪)의 화전등(花田嶝)에 이르러 관군의 기습을 받고 교전하였다. 이 전투가 청송의진의 소위 화전등전투이다. 이때의 상황을 조성길(趙性吉)은 『백운유고(白雲遺稿)』의 「병신년창의기(丙申年倡義記)」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귀화를 한다는 것은 적들과 같다. 다시 의려(義旅)를 독려하여 일을 도모하기로 기약하고 본군으로 들어오니 군수와 관졸들은 모두 도피하였다. 그리하여 그날로 군사를 돌이켜 청운역(靑雲驛)에 유진하니 홀연히 이천진(利川陣)이 화장동에서 패하여 가히 몰사하였다고 하므로 이날 밤 즉시 화장동으로 향하여 나아갔다. 겨우 마평에 도달하여 날이 밝아오는데 적진과 마주쳐서 종일토록 싸웠으나 세력이 모두 소진하여 부득이 패주하니 죽은 장졸이 6인이었다. 다시 피로한 병사들을 떨쳐 세워 경주로 향하니 겨우 인부(仁夫)[영천과 인비] 등지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적병이 사방을 포위하니 적에 저항하기가 불가하였으므로 다시 영덕으로 향하였다. 적진을 떠나 겨우 관기(官基)에 이르러 적과 마주쳐 싸워 패하니 포정은 모두 도망하고 남은 자는 거의 없었을 따름이다. 피눈물을 흘리며 보현산(普賢山)으로 들어갔다."
부동면[현 주왕산면] 상평의 뒷산에서 벌어진 화전등전투에서 청송의진은 관군의 기습 공격을 받고 6명의 전사자를 남긴 채 패퇴하였다. 청송의진은 이천의진과 함께 끝까지 연계하여 활동하였고, 화전등전투 패전 후 관군의 추격을 받으며 각처를 전전하다가 해산하였다.
[진보의진-방산 허훈이 창의하다]
1894년 방산(舫山) 허훈(許薰)은 아우 왕산(旺山) 허위(許蔿)와 함께 피난 생활을 하고 있던 중,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공포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곧이어 1896년 1월 20일 안동에서 권세연(權世淵)·김도화·김흥락·유지호(柳止鎬) 등이 창의하여 안동의진이 결성되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허훈은 창의를 독려하는 안동의진의 창의장 권세연의 편지를 받았다. 이에 허훈은 진보에서 창의하였고, 그 아우 허위는 김산에서 창의하였다.
허훈은 선산에서 진보 흥구로 돌아와 1896년 4월 7일 창의하였다. 진보의진의 창의장은 허훈이었고, 부장은 신상익(申相翼)이었다. 부장 신상익은 청송군 파천면(巴川面) 중평리(中坪里) 출신으로 진보향교(眞寶鄕校)에서 허훈을 도와 창의하여 의진의 업무와 전략을 주도하였다. 더욱이 방산 허훈은 안동의진의 창의장 권세연의 독려로 의리를 앞세워 창의의 기치를 걸었지만 직접 전투를 수행할 능력은 없었다.
1896년 3월 창의한 청송의진의 진중일기 『적원일기』에 의하면, 진보의진은 창의 이후 진보의 어천(魚川), 남면 화마리(禾馬里) 등지로 진영을 옮기며, 안동·청송·영양·의성 등 주변 의병진과 사통(私通)을 교환하며 협조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청송의진의 감은리전투 후 영양의진·청송의진과 힘을 합쳐 의성의진을 응원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고, 안동의진의 배후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민중들 산남의진으로 나아가다]
1. 청송 사람들의 의기
1906년 3월 창의한 산남의진은 정용기·정환직·최세윤(崔世允) 의병장이 이끌었던 의병진이다. 창의 초기인 1906년 3월 영천·영일·청송군 등지에서 주로 참여하였으며, 1908년 2월 이후 지역분대를 단위로 한 지구전이 전개되면서 경상북도 동남부 각처에서 참여하였다. 영천을 중심으로 청송·영일을 비롯하여 경주 등지에서 마을을 단위로 한 일족이 대오를 편성하여 참여하기도 하였고, 지역 책임자를 중심으로 대오를 이루어 참여하기도 하였다.
『산남창의지(山南倡義誌)』의 「제공실기(諸公實記)」에 의하면 청송 지역에서는 산남의진 창의 초기인 3월과 4월부터 다수의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그중 산남의진의 부서장으로 추대된 선봉장 홍구섭(洪龜燮), 후봉장 서종락, 우영장 김태언(金泰彦), 좌포장 이세기(李世紀), 유격장 임용상(林龍相), 장영집사 김진영(金震榮) 등이 주목되며, 청송군 현동면 도평(道坪)·월매(月梅) 등지의 영양남씨 일족의 참여도 주목된다.
선봉장 홍구섭은 전기의병 때 청송의진의 선봉장으로 영덕전투에서 전사한 홍병태의 아들로 산남의진 해산 이후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장영집사 김진영은 전기의병 때 청송의진의 중군장 김대락의 아들로 입암전투(立巖戰鬪) 패전 이후 은거하였으며, 경술국치 이후 만주에서 활동하던 김좌진(金佐鎭) 등과 연계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영양남씨 일족으로 산남의진에 참여한 다수의 인사들 중에서 남승하(南昇夏)·남석주(南錫珠)·남석술(南錫述)·남석인(南錫仁)·남석우(南錫祐) 등은 전기의병 때 청송의진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며, 후기의병 때는 산남의진에 참여하였다. 남석하(南錫夏)는 전기의병 때 관동의진(關東義陣), 남석태는 전기의병 때 화산의진(華山義陣)에 참여하였다가 산남의진에 참여하여 청송 화목에서 순국하였다. 그 외 남석구·남석우(南錫祐)·남복수(南福洙)·남시철(南時喆)·남정철(南定喆)·남석광(南錫光)·남규철(南圭喆)·남문희(南文熙) 등이 산남의진에 참여하여 전사하거나 해산 이후 은거하였으며, 그중 남규철은 처자를 데리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2. 신성전투
산남의진의 목표는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서울진공작전 참여였으나 8월 하순까지도 실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선 산남의진의 대장 정용기는 신돌석이 관동지방으로 진출하여 서울진공작전에 쉽게 참가하도록 배후의 일본군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산남의진은 포항·흥해·청하 등을 공략하고, 청송·신령 등지를 거쳐 9월 10일 자천으로 들어갔다. 그 후 산남의진은 안동으로 들어가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청송 노구재를 거쳐 의흥·의성·안동 등지를 거쳐 청송 안덕으로 들어갔다. 이때 산남의진은 일본군이 청송읍에서 안덕을 향해 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신성전투(薪城戰鬪)는 1907년 9월 21일(음력 8. 14) 추석 전야에 있었다. 일본군은 의병들이 추석 명절에는 차례를 지내기 위해 고향마을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고 추강 뒷산에 매복하였다. 이 사실을 미리 알고 14일 저녁 안덕 신성에 도착한 산남의진의 의병은 부대를 3대로 나누어 진을 쳤다. 의병은 저녁부터 새벽까지 일본군을 3대로 포위하고 혈전을 전개하였다. 이 전투에서 파수 이치옥(李致玉)이 전사하는 등 큰 손실을 입었다. 때마침 몰아치는 폭풍은 화승총을 사용해야만 했던 의병의 전투력을 반감시켰기 때문이다. 의병은 포위를 풀고 영일군(迎日郡) 죽장(竹長)으로 들어갔다. 신성전투 이후 산남의진은 영천 자양전투(紫陽戰鬪)와 검단전투(檢丹戰鬪), 그리고 영일군 죽장의 입암전투 등에서 수차례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정용기가 입암전투에서 전사하자 산남의진의 북상계획도 미루어지게 되었다.
안덕면 신성 1동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는 추강마을 뒷산이 산남의진의 신성전투가 전개되었던 격전지이다. 신성 1동 앞으로 추강이 흐르고 그 앞에 무당산이 있으며, 그 옆으로 개[犬]가 누워 있는 형국의 개산이 바로 추강마을 뒷산이다.
[산남의진의 분대, 유격전을 감행하다]
1908년 2월 초 5일 산남의진의 제3대 대장으로 취임한 최세윤은 지역부대의 정예화를 서둘렀다. 이리하여 산남의진은 주로 동해안 지역과 청송군 일대에서 일본 군경의 의병 초토화 작전에 대응하여 지형·지세를 이용한 소부대의 유격전을 구사하였다. 산남의진의 주력부대는 대장 최세윤이 이끄는 남동대산에 주둔하고 있던 본진이었고, 각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들은 본부와 연락을 취하면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특히 청송지역은 다른 지역부대와는 달리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즉 서종락이 지휘하는 청송 동부진과 남석구가 지휘하는 청송 서부진이었다.
1. 청송 동부진
서종락이 지휘하는 청송 동부진은 주왕산을 중심으로 청송읍과 부동면[현 주왕산면], 그리고 부남면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대장 서종락을 비롯하여 중군 우영조(禹永祚), 도총 오상영(吳相泳), 참모장 심일지(沈日之), 소모장 윤용식(尹龍植) 등으로 진용이 편성되어 있었다. 그 외 김진영·남시철·박문선(朴文善)·남정철·조경옥(趙景玉)·남석광·배상언(裵尙彦) 등이 참여하였다.
2. 청송 서부진
남석구가 지휘하는 청송 서부진은 철령(鐵嶺)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대장 남석구를 비롯하여 남석우 등 대체로 현동면 도평·월매·거성·개일 등지에 세거하던 영양남씨 일족의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최후의 항전을 치르다 -고와실전투]
1908년 4월 26일 청송군 현서면 복기동전투(復基洞戰鬪) 이후 청송지역에는 소수의 의병부대가 활동하였다. 1908년 8월 산남의진의 제3대 대장 최세윤이 장기(長鬐) 용동(龍洞)에서 피체되자, 산남의진은 그 구심력을 잃고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청송지역은 서종락과 남석구 등의 의병부대가 유격전을 통한 항전을 계속하였다. 1908년 4월 이후 서종락과 남석구가 이끄는 산남의진의 지역부대인 청송 동진(東陣)과 청송 서진(西陣)은 유격전을 통한 대일항전을 계속하였다.
1910년 서종락이 이끄는 의병들은 일본군 수비대의 공격을 받으면서 청송군 안덕면 고와실(高臥室)에 숨어들었다. 곧이어 경주·영천·의흥·청송을 관할하던 일본군 수비대는 고와실로 의병이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주위를 포위하였다. 일본군 수비대는 마을을 포위하고 사격을 가했다. 포위 공격을 받게 된 의병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하였고, 미처 피하지 못한 의병들은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이른바 고와실전투이다. 당시 청송군 부남면 출신의 배연집(裵淵楫)은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였으며, 서종락 의병장은 고와리 앞을 흐르는 백석탄(白石灘)을 따라 물밑으로 30여 리를 도망하여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체포된 의병들은 손발이 묶인 채 백석탄에서 총살되었다.
1910년 고와실전투를 끝으로 산남의진의 지역부대 청송진은 해산하였다. 청송 출신의 의병들은 체포되거나 귀순하였으며,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은거하거나 만주 등 해외로 망명하였다. 산남의진에 참여했던 청송 출신의 김성극(金聖極)·이규환(李圭桓)·홍구섭·남정철·남규철·김남준(金南俊)·김진영 등이 망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