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21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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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 |
영어공식명칭 | Histor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
집필자 | 김미엽 |
[정의]
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경기도 구리시의 역사.
[개설]
경기도 중부에 위치해 있는 구리시는 삼국 시대에는 백제·고구려·신라에 속했고, 고려 시대에는 양주·남경·한양부에 속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양주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구지라는 명칭이 등장하고, 일제 강점기인 1914년 구리면이 되었다. 이후 1963년 서울특별시가 확장되면서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은 인창리 등 7개 리로 편재되었다가 1973년 양주군 구리읍이 되었으며, 1986년 경기도 남양주군과 분리되어 경기도 구리시로 승격하였다.
[선사 시대~고대]
구리 지역의 구석기 유적은 확인되지 않으며, 신석기 시대 유적으로는 일제 강점기 구리시 사노동과 인창동 등지에서 빗살무늬 토기 파편과 흑요석으로 만든 석기 등이 수습되었으나 학술적인 검증이 어렵다.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출토 수습된 곳은 구리시 인창동·교문동·사노동과 아차산 일대로 한강과 왕숙천 주변을 생활 근거지로 삼아 농경과 어로에 종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삼한 시대 구리 지역은 마한의 영역에 속하였고, 삼국 시대 초기 백제의 영토로 흡수되었는데, 당시 백제 왕궁의 건너편인 한강 북안인 구리 지역은 국방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5세기 중엽 고구려 장수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고구려는 양주군 영역에 북한산군(北漢山郡)을, 남양주 진접읍과 진건읍 일대에는 골의노현을 설치함으로써 구리 지역도 골의노현에 소속되었다. 이후 551년 신라와 백제의 나제 동맹군이 한강 유역을 공격해 고구려를 몰아내고 백제는 영토를 수복했지만 2년 만에 동맹이었던 신라에게 빼앗겼다. 신라는 구리 지역을 포함한 남한산성 일대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이어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구리 지역을 포함한 한강 유역을 북한산군 한양군(漢陽郡)으로 삼고 관내의 골의현군을 황양현(荒壤縣)으로 개칭하였다.
[고려~조선 시대]
10세기 초 지금의 구리 지역이 포함된 경기도 양주(楊州) 지역은 명지성 장군 성달(成達)과 매조성 장군 능현(能玄)이 고려 왕건에 귀부함으로써 고려의 세력 아래 들어갔으며, 935년 견훤의 식읍으로 하사되었다. 983년 12목의 설치로 경기 동북부 지역은 양주목이 되었고, 995년 관내도(關內道)에 포함되었다. 1067년 동경·서경과 함께 양주는 남경으로 승격되었으며 1308년 충선왕의 왕권 강화책에 따라 한양부(漢陽府)로 격하되었다. 조선 시대 한양이 수도가 되면서 구리 지역을 포함한 양주는 중앙 정부의 강력한 통제 아래 들어갔다. 1394년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등되었다가 1395년 다시 양주부로 승격되었고, 1399년 양주부, 1413년 양주 도호부를 거쳐 1466년 양주목이 되었다. 구지(九旨, 龜旨)라는 명칭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나오는데 당시 양주에는 구지면을 포함하여 32면·리가 있었으며, 사노리·인장리·수택리·백교리·토막리·동창리·이문리·평촌리·아차동·우미천리 등 10리가 구지면에 속하였다.
[근대]
경기도 양주에 소속된 구지면(龜旨面)에 동구릉(東九陵)의 조선 왕릉 9릉 17위가 모셔지면서 능침의 보수와 유지를 위한 면세전인 묘위전(墓位田)이 많이 설치되었다. 1914년 행정 구역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양주군의 구지면과 망우리면이 통합되고 여기에 양주군의 진관면·별비면·미음면·노원면의 일부 지역이 편입되어 구지의 구(九)자와 망우리의 리(里)자를 따서 양주군 구리면(九里面)이 되었다. 이때 편입된 동리(洞里)도 통합되어 묵동리·중하리·상봉리·신내리·망우리·인창리·사노리·교문리·수택리·토평리·아천리·갈매리 등 12개 리로 재편되었다.
[현대]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해방을 맞았지만, 일제의 한반도 철수와 함께 일시적인 행정과 치안의 공백이 발생하였다. 이를 메우기 위해 전국적으로 인민 위원회가 결성되자 구리 지역이 속하였던 양주에서도 양주군 인민 위원회가 결성되어 이성호(李星昊)·이경규(李景圭)·이덕창(李德昌) 등이 활동하였다. 6·25 전쟁 발발 3일 만에 북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구리 지역도 북한군의 치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는 변하였고, 국군은 구리 지역 탈환을 위해 9월 26일 밤과 다음날 새벽까지 인민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한편, 1951년 1월 후퇴하던 유엔군은 중공군과 북한군의 남진을 막기 위해 한강 변의 토평리와 동구릉까지 지뢰를 설치하였는데, 훗날 제거되지 않은 지뢰로 인한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1963년 1월 서울특별시 동대문 구역 확장에 따라 묵동리·중하리·상봉리·신내리·망우리 등 5개 리가 분리되어 서울시에 편입되었고, 양주군 구리면은 인창리·사노리·교문리·수택리·토평리·아천리·갈매리 등 7개로 편제되었다. 1973년 7월 1일 양주군 구리면에서 구리읍으로 승격되었고, 1980년 4월 1일 양주군이 남양주군과 동두천시로 분리 개편될 때 구리읍은 남양주군에 속하였다. 이어 1986년 남양주군에서 분리될 때 구리시(九里市)로 승격되었으며, 7개의 법정동[6개의 행정동]으로 편제되었다. 1995년 3월 13일 행정동 교문동이 구리시 교문1동과 교문2동으로 분리되어 7개 행정동이 되었으며, 1996년 1월 8일 수택동이 수택1동으로 개칭되고, 수평동이 수택2동과 수택3동으로 분동되면서 8개 행정동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