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32165
한자 洪應神道碑
영어공식명칭 Memorial Stone for Hong Eung
분야 역사/ 전통 시대
유형 유적/비
지역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산7-2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정남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492년(성종 23)연표보기 - 홍응 신도비 건립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428년(세종 10) - 홍응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492년(성종 23) - 홍응 사망
현 소재지 홍응 신도비 -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산7-2지도보기
성격 신도비
양식 석상
관련 인물 홍상
재질 회색 편마암이 섞인 대리석
크기(높이) 167.5㎝[높이]|29㎝[두께]
크기(폭) 71㎝
소유자 남양 홍씨 문중
관리자 남양 홍씨 문중

[정의]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에 있는 조선 전기 문신인 홍응의 신도비.

[건립 연혁]

홍응(洪應)[1428~1492]의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응지(應之), 호는 휴휴당(休休堂)이다.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한성 부윤을 지낸 홍심(洪深)의 아들이다. 시호는 충정(忠貞)으로 추존왕 덕종[성종의 아버지, 의경 세자]의 부마인 홍상(洪常)의 아버지이다. 1451년(문종 1)에 중광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좌정언으로 등용되었고, 1463년(세조 9) 도승지로 있을 때 영응 대군(永膺大君)과 함께 『명황계감(明皇誡鑑)』을 국역하는 등 문장과 글씨에 능통하였다.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급제하고 1468년(예종 1)에는 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 공신(翊戴功臣)이 되었으며, 지중추부사를 거쳐 익성군(益城君)에 봉해졌다. 1471년(성종 2)에 좌리공신(左理功臣)에 이르고 익성 부원군(益城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 1479년에 우의정이 되고 1485년에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순찰사를 거쳐 좌의정이 되었다. 홍응은 풍채가 단아하고 몸가짐에 법도가 있었으며,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다. 신도비는 1492년(성종 23)에 건립되었다.

[형태·구성]

홍응 신도비는 자연석으로 방형의 경계를 나누고, 하단을 장대석으로 쌓아 지대석을 만들었는데, 3m가 넘는 대규모이고 대석이 크고 다소 높다. 전액(篆額)[전자체(篆字體)로 쓴 현판이나 비갈(碑碣)의 글자]은 '충정공신도비명(忠貞公神道碑銘)'이고, 머릿돌과 비신을 분리하여 만들었으며 마모가 심하다. 예조 참의 이숙함(李淑瑊)이 글을 짓고, 동생인 대사헌 홍흥(洪興)이 글씨를 썼으며, 1492년(성종 23)에 건립되었다. 신도비의 비신에 새긴 글은 마모되어 해독할 수가 없으며, 복련 잎에 보주가 있는 모양의 뚜껑돌이 올려져 있고 비석을 받치고 있는 대좌에는 별다른 문양이 새겨져 있지 않다. 신도비는 높이 167.5㎝, 두께 29㎝, 폭 71㎝로 묘역의 좌측 하단에 서쪽을 향해 서 있는 단정한 15세기 하엽 방부형(荷葉方趺形)이다.

[관련 사건·일화]

홍응은 조선의 역대 재상 중에서 세종 때의 정승 황희와 더불어 8년간 최장수 정승으로 재직하며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성종의 공신당 묘정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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