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330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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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桂鎔默墓 |
영어공식명칭 | Gye Yongmuk Tomb |
이칭/별칭 | 하태용(河泰鏞)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로 570[망우동 산57]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남선 |
[정의]
경기도 구리시 망우 공원묘지 내에 있는 소설가 계용묵의 묘.
[개설]
계용묵(桂鎔默)[1904~1961]의 본명은 하태용(河泰鏞)이다. 계용묵은 어릴 때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웠고, 삼봉 공립 보통 학교를 졸업한 후 서당에서 공부하다가 1921년 상경해 중동 학교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김억, 염상섭, 남궁벽, 김동인 등과 교유하며 문학에 뜻을 두었다. 계용묵은 할아버지가 신학문을 반대해 잠시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이듬해 다시 상경하여 휘문 고등 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또다시 강제로 낙향하게 되어 고향에서 4년간 지내면서 외국 문학 작품을 탐독했다. 192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 대학[東洋大學] 동양학과에서 공부하면서 야간에는 영어를 배우기도 했지만,1931년 집안이 파산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1925년 5월 『조선 문단』 제8호에 단편 「상환」으로 등단한 이래 40여 편의 단편을 남겼다. 1935년에는 정비석, 석인해 등과 함께 동인지 『해조』의 발간을 도모했으나 무산되었다. 1938년 조선 일보사에 입사하였고, 1943년 일본 천황 불경죄로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후 방송국에 들어갔으나 사흘 만에 그만두었다. 1945년 정비석과 함께 종합지 『대조』를 창간하였다. 1948년 김억과 함께 ‘수선사(首善社)’라는 이름의 출판사를 세웠다. 또한 1·4 후퇴 당시 피난을 갔던 제주도에서 월간 『신문화』를 펴내기도 했다. 1961년 『현대 문학』에 『설수집(屑穗集)』을 연재하던 중 장암으로 사망했다
[위치]
계용묵의 묘는 망우 공원묘지 관리 사무소를 지나 오른편 순환로 방향으로 가다 보면 아래쪽의 능선에 있다[묘지 번호 105383].
[변천]
계용묵의 묘는 1961년 8월 9일에 조성되었다.
[형태]
계용묵의 묘는 토분 형태로 조성되어 있고, 묘 앞에는 비석이 있다.
[금석문]
계용묵 비 앞면에는 '작가계용묵지묘(作家桂鎔黙之墓)'라 쓰여 있고, 뒷면에는 '중요 작품명 백치 아다다 병풍에 그린 닭이 별을 헨다 이 밖에 60여 편을 남겼다 부인 안정옥 자 명원 녀 정원 도원 손 근우 근주 근연(重要 作品名 白痴 아다다 屛風에 그린 닭이 별을 헨다 이밖에 60餘篇을 남겼다 夫人 安靜鈺 子 明源 女 正源 道源 孫 根宇 根宙 根蓮)'이라고 새겨져 있다. 비석의 왼쪽에는 '1962년 8월 9일 현대 문학사와 문우 일동이 세우다(一九六二年 八月 九日 現代文學社와 文友 一同이 세우다)', 오른쪽에는 '1904년 9월 8일생 1961년 8월 9일 몰(一九0四年 九月 八日生 日九六一年 八月 九日 歿)'이라고 새겨져 있다.
[현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