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330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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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利錫墓 |
영어공식명칭 | KimIseok Myo|Tomb of KimIseok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84-2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남선 |
[정의]
경기도 구리시와 서울특별시 중랑구 경계의 망우 공원묘지 내 구리시 방향에 있는 근현대 소설가 김이석의 묘.
[개설]
김이석(金利錫)[1915~1964]은 일찍부터 문학적인 재질을 나타내 보통학교 때인 1925년에 동요 「돌배나무」를 발표하였다. 1927년 평양 종로 보통학교와 1933년 평양 광성 고등 보통학교를 거쳐, 1936년 연희 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으나 1938년 중퇴하였다. 연희 전문학교 재학 당시인 1938년 단편 소설 「환등(幻燈)」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1938년 단편 소설 「부어(腐魚)」가 『동아 일보』에 입선되면서부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했다. 1941년 평양 명륜 여상(明倫女商) 교사로 근무했으며, 1946년 1·4 후퇴 때 가족을 두고 월남하여 대구에서 생활하였다. 1951년 중부 전선에서 종군 작가단으로 활동하였으며 1953년에는 『문학 예술』 편집 위원과 성동 고등학교 강사직을 맡았다. 1956년 작품집 『실비명』을 발표하였다. 1957년부터 집필에만 전념하는 한편, 1958년 작가인 박순녀(朴順女)와 재혼하여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월남한 지식인들의 비참한 삶의 모습을 서술한 작품으로 활발한 창작 활동을 하였다. 그 밖에 「동면(冬眠)」(1958) 등 다수의 작품을 집필했다. 또한 단편 소설 외에 1962년 역사 장편 소설 『난세 비화(亂世飛花)』를 『한국 일보』에 연재하여 대중의 인기를 얻었는데, 1964년 역사 장편물인 『신홍길동전(新洪吉童傳)』 집필 중 고혈압으로 작고하였다.
[위치]
망우 공원 관리 사무소를 지나 좌측 순환로 방향으로 가면 동락천 약수터가 나오고, 약수터을 지나가면 왼편에 팔각정이 나타난다. 다시 팔각정에서 오른쪽 길로 올라가다 보면 문일평의 묘역이 보이고 왼쪽으로 두 번째 묘가 김이석의 묘이다[묘지 번호 203693].
[변천]
김이석 묘는 1964년 9월 18일에 조성되었다.
[형태]
김이석의 묘는 토분 형태로 아담하게 조성되어 있고, 묘 앞에 비석이 서 있다.
[금석문]
비문 전면에는 '작가 김이석묘 1915. 7. 16.~1964. 9. 18.(作家 金利錫墓 1915. 7. 16.~1964. 9. 18.)'라고 쓰여 있고, 후면에는 '오색기가 하늘 높이 펴쳐지는 매화포 소리가 쾅하고 울려지면 그 소리를 따라 백여 명의 건아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서 평양역을 향하여 달리었다. 시가 곳곳에서는 군악이 울려났고 시민들의 환호 소리는 하늘을 진동했다. 참으로 장관이었다.-「失碑銘」에서'라고 쓰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