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420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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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始萬 |
영어공식명칭 | Oh Siman |
이칭/별칭 | 영석(永錫),춘헌(春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미엽 |
[정의]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오시만(吳始萬)[1647~1700]의 본관은 동복(同福)이다. 아버지는 오정일(吳挺一)이고, 어머니는 사인(舍人) 정호선(丁好善)의 딸이며, 예조 판서 오정위(吳挺緯)에게 입양되었다.
[활동 사항]
오시만은 1666년(현종 7)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76년(숙종 2) 정시 문과(廷試文科)에 장원으로 합격한 뒤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과 사헌부 지평을 역임하였다. 1679년 문과 중시(文科重試)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사헌부 헌납·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680년 이조 좌랑을 거쳐 부교리가 되었고, 이듬해 1681년 승지(承旨)가 되었다. 1690년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가 전(前) 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의 일로 아버지 오정위(吳挺緯)가 심문을 받자 체직되었다. 1694년 당쟁과 연관되어 이광저(李光著)의 탄핵을 받아 용천(龍川)·강서(江西) 등지로 유배되었다. 유배 중에도 경학(經學)에 힘썼으며, 문장에 뛰어났다.
[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