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11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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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地圖 |
영어공식명칭 | Antique Map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진희 |
[정의]
조선 시대에 간행된 구리 지역과 관련한 옛 지도.
[개설]
현재의 구리시 지역이 포함된 양주목이 표기된 지도는 『광여도』, 『해동 지도』, 『1872년 지방도』, 『여지도』, 『팔도 군현 지도』 등이 있다. 이들 지도는 제작 방식에 따라 필사본과 목판본으로 구분되고, 지도의 형태에 따라 회화식과 방안식, 기호식으로 구분된다. 지도에 수록되는 규모에 따라 천하 지도, 전국 지도, 지방 지도, 읍 지도 등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지도는 지방의 실정 파악 및 방어 체계 점검 등의 목적을 가지고 주기적으로 제작되었으며, 18세기 말까지는 지도 제작의 주도권을 국가가 쥐고 있었다. 본래 관찬 지도집은 거의 회화식 지도집으로 제작하였는데 양란을 거치면서 회화식 지도집의 흐름이 기호식 지도집으로 대체되었고, 기호식 지도집을 편찬하게 되면서 관찬 회화식 지도집은 정책 자료로서 의미를 잃게 되었다. 그리고 공적 통제력이 급속히 이완되는 19세기의 정치적 환경과 맞물리면서 관에서 편찬한 회화식 군현 지도집이 민간에 유출되어 개인이 편찬하는 지도집이 발간되기 시작하였다.
관찬(官撰) 지도와 더불어 사찬(私撰) 지도가 발간되면서 각 편찬 주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에 따라 지도에 표기되는 내용이 조금씩 달랐다. 사찬 지도집인 『광여도」에는 도로가 없고 주로 장 등의 정보가 담겨 있고, 관찬 지도집인 「해동 지도」에는 도로가 담겨 있는 것 등이 그 예이다. 이와 더불어, 특정한 지도집을 저본으로 삼아 제한된 범위의 정보만을 갱신하여 지도집을 제작하게 되면서 서로 시기가 맞지 않는 정보가 한 지도집에 수록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구리 지역의 고지도]
현재 구리시 지역이 표기된 고지도와, 각 고지도에서 찾을 수 있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1712년과 1767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관동 지도(關東地圖)』는 채색 필사본 지도책으로, 1책 경기도 지도에 양주목이 그려져 있다. 구지면과 망우리면은 표기되어 있지 않고, 도로와 하천명도 표기되어 있지 않다. 현 동구릉(東九陵)은 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建元陵)만 표기되어 있다.
2. 1750년대 초에 제작된 관찬(官撰) 회화식 군현 지도인 『해동 지도(海東地圖)』 1책에 양주목이 등장하며, 구지면만 등장하고 망우리면은 등장하지 않고, 왕숙천이 독음강(禿音江)으로 흘러감을 서술하고 있다. 독음강은 전곶교(살곶이 다리)에 이르러 중랑천과 합수하여 한강이 된다. 동구릉은 1776년에 조성된 원릉(元陵)[영조의 능]과 그 이후에 조성된 경릉(景陵)[헌종의 능]·수릉(綏陵)[익종의 능]이 빠진 육릉내(六陵內)로 표기되어 있으며, 봉분 안에 동그라미를 그려 묻힌 사람의 수를 나타냈다.
3. 1767년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팔도 분도(八圖分圖)』에 양주목이 그려져 있으며, 구지면과 망우리면은 표기되어 있지 않다. 동구릉이 육릉(六陵)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도로도 표기되어 있지 않고 하천 이름 역시 표기되지 않았다.
4. 1776년과 1785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 팔도 지도(朝鮮八道地圖)』「경기도」 지도에는 구지면과 망우리면이 표기되어 있다. 동구릉이 칠릉(七陵)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1776년 조성된 원릉이 반영된 것이다. 도로가 표기되어 있으나 하천 이름은 표기하지 않았다.
5. 『해동 지도』보다 늦은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회화식 군현 지도인 『여지도(輿地圖)』[서울 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古 4709-68] 1책에 양주목이 그려져 있으며, 구지면과 망우리면이 표기되어 있다. 동구릉은 육릉내로 표기되었고, 봉분은 동그라미로 다섯 개만 그려져 있다. 『조선 팔도 지도』에 칠릉으로 표기된 것과 비교할 떄, 『조선 팔도 지도』보다 늦은 시기에 제작되었거나 해당 내용이 반영되지 않았다고 이해할 수 있다.
6. 총 3권으로 이루어진 『여지도(輿地圖)』[서울 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古 4709-78] 2책 「경기도」 지도에 양주목이 그려져 있다. 구지면과 망우리면이 표기되어 있지 않고 하천 이름 역시 표기되지 않았다. 이 지도책은 1789년 양주에서 수원으로 이장한 사도 세자의 영우원(永祐園)이 표기되어 있어 1789년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동구릉이 칠릉으로 표기되어 있다.
7. 19세기 전반에 제작된 전국 군현 지도인 『광여도(廣輿圖)』 1책에 양주목이 등장하며, 구지면과 망우리면이 표기되어 있다. 편찬 하한은 1800년대인데, 동구릉이 육릉으로 표기되어 있고 원릉·경릉·수릉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18세기 전반의 사정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8. 회화식 필사본 지도책인 『지승(地乘)』 1책에 등장하는 양주목에는 구지면과 망우리면이 표기되어 있고, 도로가 그려져 있으며 아차산 부근에 망우치(忘憂峙)가 표기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동구릉은 육릉이라고 표기되어 있고 봉분과 동그라미로 그려져 있는데, 정확한 수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능묘 권역 대강의 형태만을 나타낼 뿐이다.
9. 19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국 여도(東國輿圖)』는 도성을 중심으로 한 전국적인 방어 체제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한 군사 지도로, 군영과 전략적 요충지 그리고 도로를 중심으로 그려 넣었다. 양주목의 위치는 표기되어 있으나 이하 읍면의 위치는 표기되어 있지 않으며 능묘 권역 및 창고의 위치도 표기되어 있지 않다. 왕숙천(王宿川)이 왕산탄(旺山灘)으로 표기되어 있다.
10. 1861년에 제작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양주목이 표기되어 있는데, 이하 읍면 명칭은 표기되어 있지 않으며 동구릉은 건원(建元)이라고만 표기되어 있다. 왕숙천은 왕산천(王山川)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지도를 설명 내지 필사한 채색 지도인 『대동방여전도(大東方輿全圖)』에도 왕산천으로 표기되어 있다.
11. 조선 시대 관찬 지도 제작 사업의 마지막 성과로 평가되는 『1872년 지방도』에는 구지면과 망우리면이 표기되어 있으며, 구릉(九陵)이 표기되어 있고 봉분 수만큼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사창(私倉)의 위치와 도로 위치를 표기하였다.
이상의 지도는 『대동여지도』를 제외하고 대부분 필사본 지도이다. 필사본 지도에는 현 구리시 지역[양주목 구지면, 망우리면]의 지리적 특성인 지명·도로·명소 등이 비교적 잘 그려진 데 반해 목판본 지도에는 군현 단위의 지명과 산 정도만 표기되어 있다. 이는 목판에 세밀한 표현을 하기 힘들었기 때문으로 추측할 수 있으며 상대적으로 세밀한 표현이 가능한 필사본 지도에 다양한 정보가 포함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