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21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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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石器時代 |
영어공식명칭 | the Stone Age |
분야 | 역사/ 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
시대 | 선사/석기 |
집필자 | 김미엽 |
[정의]
경기도 구리 지역에서 돌을 이용하여 칼과 도끼 따위의 도구를 만들어 쓰던 시대의 역사와 문화.
[개설]
석기시대는 석기의 제작 방법에 따라 뗀석기[타제 석기]의 구석기와 간석기[마제 석기]의 신석기로 나누어진다. 구석기시대는 최초의 고인류가 나타난 시기부터 약 1만 년 전까지의 시기이며, 신석기시대는 대략 기원전 8000년에서 기원전 6000년 경에 시작되었다고 본다. 한반도의 경우 구석기시대는 약 70만 년 전으로,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6000년경부터 시작되었다고 추정한다. 경기도 구리시는 구석기시대와 관련된 유물이나 유적이 발굴되지 않았기에 인접한 한강 유역의 유적으로 추정하고, 신석기시대의 경우는 빗살무늬 토기가 출토되었으나 시기 추정이 불가능하기에 미사리 유적을 통해 추정한다.
[구석기시대]
1962년 함경북도 웅기군 굴포리와 1965년 공주 석장리 발굴로 구석기시대가 확인되면서 한반도에서의 인류 역사는 시기적으로 상당히 올라가게 되었다. 지금까지 한강 유역에서는 제원 점말동굴, 단양 금굴, 단양 수양개, 제원 창내, 서울 역삼동·가락동·암사동·면목동·양평 양근리 유적 등 구석기 유적 30여 곳이 조사되었다. 이들 유적 중 한때나마 경기도 양주 지역에 포함된 지역의 유적으로는 남양주시 화도면의 검터·두촌·마진·마재와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유적이 해당된다. 이 중 구리시와 가장 인접한 유적은 1967년에 조사된 면목동 유적이다. 이 유적 주변은 아차산 서쪽 사면의 끝부분 앞쪽에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고, 그 가운데로 중랑천이 흐르고 있어 구석기인들이 일시 거주하기에는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는 적갈색 점토층에서 300여 점의 석기와 파편들이 발견되었는데, 외면 찍개·망치돌·마치돌 등의 몸돌 석기와 뾰족개·옆날 긁개 등의 격지 석기들로 모두 석영 맥암 석기이며, 3만 년을 전후하는 구석기 후기 문화층의 것이다.
[신석기시대]
구석기시대와 비교하여 신석기시대의 큰 차이점은 채집 경제에서 생산 경제로 전환되고, 토기류가 사용되고 및 정착을 한다는 점이다. 한반도에는 신석기시대 후반 중국 화북 지방에서 농경의 방법이 전수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때 돌보습·돌괭이·돌낫·반달칼·짐승의 뼈로 만든 괭이·낫 등이 도구로 사용되었고, 도토리·조·피 등이 식량으로 사용되었다. 현재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의 유적은 2,000여 곳으로, 대동강과 한강 및 서해안 지역, 두만강 중심의 동해안 지역, 그리고 낙동강 유역의 남해안 지역으로 대별된다. 구리 지역에서는 신석기 유물인 빗살무늬 토기의 파편이 구리시 인창동과 구리시 사노동 등지에서 출토되었지만 이 유적들은 모두 파괴되어 학술적으로 검증하기 어렵다. 다만 이 유적지와 비교적 가까운 미사리 유적의 성격을 볼 때 기원전 4000~3500년을 상한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이는 미사리를 포함한 주변의 한강 유역에서 신석기시대 주민이 거주하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