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320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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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羅星斗墓 |
영어공식명칭 | NaSeongdu Myo|Tomb of NaSeongd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사노동 산163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명희 |
[정의]
경기도 구리시 사노동 안정 나씨 묘역에 있는 나성두의 묘.
[개설]
나성두(羅星斗)[1614~1663]는 조선 중기 해주 목사를 지낸 문신으로 본관은 안정(安定), 자는 우천(于天), 호는 기주(其洲)이다. 나만갑의 아들이며, 우의정을 지낸 장유(張維)의 문인이다. 호조 좌랑과 봉산 현감 등을 지내며 농사를 권장하고 공명정대한 정치를 해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따라 안동에 기거하였는데, 이때 안동에 살던 김상헌(金尙憲)과 서로 내왕하였다. 송시열의 천거로 해주 목사가 되어 임지에 부임하자 그 사이의 묵은 폐단을 개혁했는데, 이이(李珥)의 향약을 실시하도록 권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였다.
[위치]
나성두 묘는 경기도 구리시 사노동의 안정 나씨 묘역에 있다. 묘역 입구에 나만갑 신도비 비각이 보이며 묘역의 구릉 초입에 나성두 신도비가 있다. 묘역 서쪽으로는 구리 고속 도로가 지나가고, 남쪽으로는 논밭이 있다.
[변천]
나성두 묘는 1981년 경기도 과천시에서 묘를 개장하여 현재의 경기도 구리시 사노동 안정 나씨 종중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형태]
나성두 묘는 나양좌의 묘 바로 밑에 있으며 부인인 경주 김씨와의 합장묘이다. 나양좌는 나성두의 아들인데, 나성두의 봉분이 아들보다 아래에 있는 것은 원래 과천에 있었던 묘를 1981년 이장해 왔기 때문이다. 봉분 뒤에는 낮은 둔덕이 있고 봉분에는 호석이 있다. 바로 앞에 묘갈(墓碣)[무덤 앞에 세우는 둥그스름한 작은 비석]이 대좌 위에 있고, 오른편에는 근래에 세운 용관을 씌운 비석이 있다. 봉분 앞의 비석은 비신이 위로 올라갈수록 넓어지며 뒤에는 가첨석(加檐石)[지붕돌]을 얹었다. 묘갈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영혼이 나와서 놀게 하기 위하여 무덤의 앞에 설치해 놓는 직사각형의 돌]과 상석, 그리고 향로석(香爐石)[무덤 앞에 향로를 올려놓는 네모반듯한 돌]이 나란히 놓여 있다. 상석 좌우로 장대석이 놓여 있어 단을 이루었는데 상석은 북돌 없이 앞쪽은 걸방석이, 뒤쪽은 댓돌이 받치고 있다. 그리고 가운데 앞쪽에는 하대석(下臺石), 상대석(上臺石), 화사석(火舍石), 그리고 옥개석(屋蓋石)[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에 지붕처럼 덮는 돌]이 8각을 이루고 있는 특이한 형태의 장명등이 있다. 간주석(竿柱石)은 갈기가 서로 연결되어 마주보고 있는 사자 형상을 조각하였는데 사자의 앞다리와 입으로 상대석을 떠받치고 있다. 하대석에는 연화문이 새겨져 있다. 묘 양편으로 금관 조복 차림의 문인석(文人石)[문관의 형상으로 묘 앞에 세운 돌]이 한 쌍 있고 조금 앞에 망주석이 한 쌍 놓여 있다. 석물들 중 호석과 망주석은 근래의 것이다.
[금석문]
나성두 묘의 묘비 건립 연대는1684년(숙종 10)이며, 전면에는 '유명해주목사나공성두지묘숙인경주김씨부좌(有名海洲牧使羅公星斗之墓淑人慶州金氏祔左)'라고 새겨져 있다. 묘갈문(墓碣文)을 지은이는 박세당이고, 윤추가 글씨를 썼으며, 김수항이 전서(篆書)를 썼다. 나성두가 죽은 지 13년이 되자 박세당이 묘갈문 청탁을 받고서 여러 행장(行狀), 묘표(墓表), 묘지(墓誌)의 서차에 근거를 두고서 지었다고 한다. 나성두의 묘갈문 뒤에는 1708년(숙종 34)에 윤증(尹拯)이 짓고, 나연(羅演)이 글씨를 쓴 부인 경주 김씨의 묘갈이 부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