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42055 |
---|---|
한자 | 羅星斗 |
영어공식명칭 | Na Seongdu |
이칭/별칭 | 우천(于天),기주(碁洲) |
분야 | 역사/ 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사노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미엽 |
[정의]
경기도 구리시 사노동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안정(安定), 자는 우천(于天), 호는 기주(碁洲)이다. 아버지는 참의 나만갑(羅萬甲)이고, 어머니는 좌찬성 정엽(鄭曄)의 딸이다. 동생으로 나성한(羅星漢)·나성문(羅星文)·나성하(羅星河)가 있고, 아들로 나명좌(羅明佐)와 나양좌(羅良佐)가 있다. 할아버지는 나급(羅級)이다.
[활동 사항]
나성두(羅星斗)[1614~1663]는 장유(張維)와 정홍명(鄭弘溟)의 문하에 있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나만갑을 따라 경상북도 안동에서 생활하였는데 이때 김상헌(金尙憲)도 안동에 살고 있어 서로 내왕하였다.
나성두는 1646년 식년 진사시에 3등으로 합격하였다. 1647년 4월에 시직(侍直)에 임명되었고, 1648년 7월에 세자익위사 소속 종6품 관직인 위수(衛率)로 임명되었다. 1649년 1월에 호조 좌랑에 임명되었고, 2월에는 봉산 현감(鳳山縣監)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고을 아전 정행(鄭行)의 종이 주인을 배반하고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집으로 가서 정행을 모함하여 귀양보냈다가 새로 부임한 나성두가 이 일을 조사한다는 것을 알고는 인평 대군에게 호소하였다. 나성두는 종의 어미를 가두면서 인평 대군과 갈등을 겪게 되었으며, 결국 그해 4월에 봉산 현감을 사직하였다. 이후 이산 현감(尼山縣監)으로 재직하다가 그 공적을 인정 받아 1659년(효종 14)에 해주 목사(海州牧使)가 되었다. 그동안의 폐단을 바로잡고 율곡 이이(李珥)의 향약을 실시하였으며, 율곡의 사원(祠院)을 수리하여 인재를 기르도록 하였다. 청백리(淸白吏)로서 이름이 있었다.
[묘소]
경기도 구리시 사노동에 묘와 신도비가 있다.